류성룡, 신태영 외, 징비록, 논형, 2016
류성룡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는 잘 알려져 있듯이, 지난 일을 반성하여 후환을 조심하기 위해서이다. “전란의 시초”와 “임진왜란의 일”을 기록하여 후대에는 두 번 다시 이러한 재난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징비록』을 쓴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독자는 ‘과연 무엇을 징비(懲毖)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저절로 따라온다.
전쟁을 막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우선 임진왜란이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전쟁이 일어난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에 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침략 의지가 만들어낸 전쟁이므로,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비난의 대상은 일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여야지, 이를 조선으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혹자는 일본 사절단을 갔다 온 김성일과 황윤길의 서로 다른 내용의 보고를 근거로, 동인과 서인이 당쟁에 빠져 전쟁 방비를 소홀히 한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징비록』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도, 오늘날의 선입견과는 달리 조선이 아예 무방비 상태로 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기록을 추려보자.
“우리 조정에서는 왜국의 침입을 근심하여 변방의 일에 능통한 재상을 뽑아서 삼남 지방을 순찰하고 방비토록 하였다. 김수를 경상 감사로, 이광을 전라 감사로, 그리고 윤선각을 충청감사로 삼아서 병장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수축케 하였다. 특히 경상도에 성을 많이 쌓게 하였으니, 이를테면 영천·청도·삼가·대구·성주·부산·동래·진주·안동·상주의 좌우 병영을 새로 쌓거나 고쳐 쌓았다.”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날로 급속하게 퍼지자, 임금님께서 비변사에 명하여 장수될 만한 재목을 각자 천거하도록 하였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하여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등급을 뛰어넘어 수사(水使)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사람들 중에 더러 고속 승진을 의심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는 해자와 성을 새로 쌓거나 병영을 개선하여 적이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에 대비한 인재 선발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인용문에 주목해보자. 전쟁의 가능성이 불거지면서 조정에서는 능력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류성룡의 추천으로 이순신은 ‘고속 승진’이 의심될 정도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조선이 전쟁 준비를 소홀히 했다고는 보기 힘들겠다.
물론 “나라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어 중앙과 지방이 모두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고, “군정의 근본인 장수를 뽑는 요령과 군사를 조직하고 훈련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백에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류성룡의 비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조선이 침략에 대비한 어떤 노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시덕이 지적하듯이,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본 같은 해양 세력은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국가의 존립을 위협할 만한 대규모 공격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바다보다는 육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현명한 생존이었다.” (김시덕,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다 했을 때 왜구, 혹은 명종 대 을묘왜변 수준의 침공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조선군은 질이 매우 낮았던 반면에, 일본군은 100년간의 전국시대 동안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이었다. 게다가 그 수도 20여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전쟁 초반에 조선이 압도적으로 무너진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적의 수준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임진왜란을 통해서 무엇을 반성하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징비록』에서 류성룡이 진단한 원인 분석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류성룡은 조선이 일본과 친교를 유지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일본의 정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비판한다.
그는 신숙주의 유언을 인용하면서 -“원하옵건대, 우리나라는 일본과 화평을 잃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성종 대 이후로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신숙주의 유언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반성한다. 성종은 신숙주의 말대로 사신을 보내 일본과 “더 화목하게 지내려고” 했다. 그러나 대마도에 이르러 풍랑 때문에 사신들이 병이 생기자 원래 보낸 사신을 돌아오게 하고, “이로부터 다시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매번 그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예를 갖추어 접대만 하였다.” 조선이 일본의 정보를 얻을 수 있던 통로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이나 왜관뿐이었던 것이다.
한명기의 설명을 통해 당시 일본과 조선의 전사(前史)를 간략히 살펴보자. 조선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책, 삼포 왜관 등 경제적 반대급부를 주는 회유책을 구사하였다. 그런데 삼포 지역(현재의 부산, 창원, 울산)에서 일본인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조선 정부는 이들에 대한 통제와 억제 정책을 강화했고, 결국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을 겪으며 “쇼군과 오우치씨, 쇼니씨 이외에는 접대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상업적 교류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조선과 일본의 사이는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전국시대 통일 이후 “대마도를 주요 대상으로 무역 등을 통해 일본을 회유, 교린하려 했던 조선의 시도는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한명기, 「국제 관계와 전쟁」, 『조선시대사 1 – 국가와 세계』, 푸른역사 참조)
대일관계가 악화되어 갔던 사이에 일본은 거의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종적으로 일본을 통일하여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통일 직후부터 조선, 명을 경유하여 인도 정복을 구상하고 준비했던 듯한데, 문제는 조선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도요토미가 철저히 입단속을 시킨 듯, “여러 섬의 왜인들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왕래하면서도 그 엄한 영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누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일본이 착실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와중에도 조선은 가만히 있었고, 준비도 면에서 큰 차이가 난 채로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더해 앞서 언급한 압도적 무력의 군사들이 들어오면서 초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대비 실패는 궁극적으로 외교적 실패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의 정치인들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무심하였고, 그로 인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 결과로, 조선은 7년 동안 혹독한 전란에 시달렸다. 류성룡의 징비(懲毖)는,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주변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외교적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못했음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