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은 어떻게 정당화되었는가
이 책은 임진왜란사 연구의 권위자인 기타지마 만지가 쓴 임진왜란 통사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임진왜란 전 과정을 상세하게 잘 정리하였다. 일본 측 사정도 서술된 것이 장점이다. 임진왜란 통사 책을 원한다면, 이 책을 권한다. (단, 전쟁 발발 전 조선은 동서분당으로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각주에도 나오듯이 식민사관 당파성론으로 보이니, 이 부분은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일본이 전쟁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임진왜란은 논란의 여지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그는 1585년 간파쿠에 취임한 직후부터 명 정복의 구상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앞서 ‘태양의 아들’ 신화를 창조해낸다. 그는 전국시대 당시 “천하통일은 천명”이라는 논리를 통해 자신의 전국 통일 행위를 정당화했다. ‘천명’에 의해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고 난 뒤, 그는 조선과 류큐를 포함하여 명나라와 루손(필리핀), 천축까지 복속시키는 계획을 구상한다. 이렇게 “동아시아를 정복하여 중국에 새로운 정복왕조”를 수립하고자 했던 그에게는 ‘천명’ 논리를 강화한 ‘태양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태양의 아들’에 의한 동아시아 정복 구상은,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되어 임진강 전투 이후로 “일본군 속에서 ‘신국의식’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임진강 전투를 묘사한 기록에서, 이 전투는 과거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진구 황후’의 전설과 오버랩되었던 것이다. 진구 황후의 정벌과 임진왜란을 겹쳐보는 인식은 “무사와 승려는 물론이고,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안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히데요시 역시도 진구 황후 전설을 의식한 듯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에 진구 황후의 사당에 참배했었다. 과거의 전설이 현재의 ‘태양의 아들’ 신화와 절묘하게 결합됨으로써, 전쟁의 명분은 이제 토착 신앙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되고 히데요시의 정복 전쟁은 종교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더욱 확대된 전쟁 양상은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과 일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말로, 애매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에 조선과 일본의 상이한 전쟁 기억을 낳은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사후 그가 묻힌 곳에 도요쿠니샤(豊国社)가 창건되고, 에도 시대 동안 그에 대한 숭경(崇敬)이 계속되었다. 이와 동시에 에도 시대에 진구 황후 전설과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국학자들에 의해 일본주의적으로 추앙되었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볼 수 있다.
야마가 소코아라는 유학자는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 이래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라며,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은 일본의 무위를 이역 땅에 드러낸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진구 황후와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을 바탕으로 국가의식을 고양시켰다. 막말 대표적인 존왕양이 지사 요시다 쇼인도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해, 히데요시를 높이 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전쟁 인식은 조선 멸시관으로 표출되는데, 여기서 조선은 다시 정벌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토착 신앙과 결합한 진구 황후의 전설과 히데요시의 정벌에 대한 기억이 이들의 정벌 논리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이 메이지 유신 이후까지 이어져, 에도시대 일본의 도요토미 인식은 “근대의 정한론을 합리화하도록 했고, 조선 식민지화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가 되어갔다.
다카기 히로시에 따르면, 제국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20세기 ‘제국’ 시대의 ‘해외웅비(海外雄飛)’ 이미지”와 오버랩되어, 그 자신은 “외정의 군대를 일으켜 국위를 해외에 떨친 호걸”로 묘사되기에 이르렀고, 이 역사관을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이 배우게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관련한 문화유산은 식민지 조선의 통치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며 정비되었다.”
20세기에 히데요시가 남긴 망령은 다시금 침략의 논리로 부활하였다. 그의 구상은 조선부터 천축까지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때 ‘천축’은 동남아시아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므로, 히데요시는 조선, 중국과 함께 동남아시아를 정복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 구상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역사의 반복이다.
20세기 제국 일본이 조선 침략 정당화 논리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현대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떠올리게 한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A급 전범들과 전쟁 중 사망한 황군들을 위령하고 있다.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미야자와 기이치, 하시모토 이치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자민당 의원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었고,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아베 신조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합헌이라고 판정했다. 일본의 극우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전범들에 대해 ‘그들은 전범이 아니다’, ‘그들에게 참배하지 않은 일본 내각은 일본인이 아니다’ 등의 막말을 내뱉는다.
극우파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일본의 전쟁 책임이 전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데에서 발생했을 것이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의 법조계에 의해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합헌으로 승인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최종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셔널리즘의 세례를 받아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화 논리로 이용되었듯이, 전범들을 추앙하고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가리는 논리와 역사 인식이 훗날 긍정적인 유산으로 남거나 긍정적으로 이용되지 않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