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비딕』은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주인공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가령, 모비 딕, 이슈메일, 에이해브), 무엇에 주목하여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질 만큼 풍부하고 모호한 상징들로 가득 찬 작품이다. 솔직히 읽기는 읽었지만, 아직 이 소설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전체를 이해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중간중간 나오는 고래 설명하는 부분은, 넘기거나 대충 읽거나 했다. 정확히는 발췌독으로 다 읽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내가 주목한 부분만 간략히 기록해두고자 한다. 나는 에이해브 선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모비딕』을 이해해보고자 했다.
2.
『모비딕』은 주요 등장인물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성경에서 다양한 메타포를 따왔다. 이슈메일은 아브라함의 자식 이스마엘을 영어식으로 읽은 이름이다. 에이해브는 구약 <열왕기> <역대기>에서 나오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이름을 영어 발음으로 읽은 이름이다. 그리고 피쿼드호가 출항하기 전에 에이해브의 파멸을 예언한, 어딘가 똘끼 있는 남자의 이름은 일라이저, 즉 아합과 대립했던 예언자 엘리야이다.
이렇게 기독교적 상징을 곳곳에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품에서 당연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제9장 매플 목사의 설교일 것이다. 자각적 정신을 가진 행위자로서 작가가 아무 이유 없이 매플 목사의 설교를 소설에 넣었을 리는 없다.
매플 목사의 설교 본문은 요나서이다. 그 설교의 주제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죄인에게 내려지는 멸망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 요나서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멜빌이 요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다. 내 생각에, 요나는 에이해브와 상동(相同)하지만, 정반대되는 인물이며, 『모비딕』에서 이 설교는 작품 전체의 결말과 에이해브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요나를 이해하면, 자동적으로 에이해브의 캐릭터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매플 목사의 설교에서 요나는 “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자”로 그려진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타르시스(오늘날의 스페인)로 가려 한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함과 동시에 그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인 요나에게 하나님은 “고래의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나 살아 있는 파멸의 심연으로 그를” 삼켰다.
요나는 신을 거역한 자였지만, 그 대가는 고래에 삼켜지는 벌이었다. 고래의 배 안에서 요나는 3일 동안 회개하고, 3일이 지나고 뭍으로 나온다. 이제 그는 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니느웨에 가서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 결국 불복종으로 인해 요나에게 내려진 벌은, 요나의 “진실하고 성실한 회개”를 통하여 거두어졌다. 요나는 순종과 회개하여 다시 삶을 얻었고, 그 보상으로 “최고의 기쁨”을 얻는다. 왜냐하면 “최고의 기쁨은 어떤 법률이나 주인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신을 주님으로 받들며 천국에만 충성을 바치는 애국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면, 요나는 처음에는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나 결국 신에게로 회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반면에 에이해브는,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에게 대적하는 자이다. “신앙심은 없지만 신 같은 사람(god-like man, 122p)”이라는 표현은 그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에이해브는 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신앙심이 없다. 대신 그 자신이 신과 같은 인물이다. 다른 곳에서는 “기독교 세계의 이방인”이라고 그를 묘사하여(204p), 그가 기독교 세계에서 떠났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하나님과 대적하는 존재임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에이해브가 신실한 기독교도 스타벅과 죽기 직전까지 대립했던 것은 필연이었다.
에이해브가 그토록 죽이려는 ‘모비 딕’ 역시 여러 상징으로 점철된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에이해브는 이전 항해에서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지만, 모비 딕을 향한 그의 복수심은 단순히 다리를 잃어버린 데서 오지 않았다. 그는 이전부터 모비 딕에 대해 복수심을 품었던 것이다. 제41장 ‘모비 딕’에는 그의 복수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은 앙금을 휘젓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 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에이해브는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고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던 것이다.” (242p)
에이해브의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가 담긴 감정이다. 이 복수는 일단 모비 딕을 향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을 향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왜냐하면 같은 곳에서 모비 딕을 “욥의 고래”(리바이어던)라고 부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이해브는 신이 창조한 작품을 죽이려고 드는 것이다. 신실한 기독교도 스타벅이 에이해브의 목적을 “하늘을 모독하는 그의 목적”이라고 탄식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223p). 이렇게 보면, 에이해브의 항해는 신 혹은 절대자로부터 벗어나려는 한 인간 실존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점에서는 요나와 같지만, 결국 그는 끝까지 신에게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맑은 정령이여, (중략) 나는 그대의 불가사의한 위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힘이 나를 무조건 지배하려 들면, 나는 지진 같은 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저항하겠다. (602p)
그는 절대적인 힘의 지배를 극구 거부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681p)
유언과도 같은 이 에이헤브의 마지막 말에서는, 자신의 실존을 위협하는 절대적 존재에 겁먹지 않고 오히려 죽어서까지도 그와 대결하려는 비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요나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는 요나와 같은 기쁨은 약속되지 않는다. 이를 알았음에도 에이해브 선장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불가사의한 존재와 대결하였고, 이때 삶의 절정에 이르렀다. 역설적이게도, 삶의 절정에서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4.
『모비딕』을 읽으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장벽이, 바로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서술되는 고래에 관한 묘사이다. 고래의 모습, 먹이, 생태 등등. 이것만 읽어도 고래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이다. 에이해브와 피쿼드호의 항해 이야기만 읽고 싶다면, 이 고래에 대한 박물지적 서술은 건너 뛰어도 읽는 데 별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왜 멜빌이 이렇게까지 고래를 자세하게 설명했는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어쩌면, 이것이 허먼 멜빌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 것일 수 있다. 멜빌은 『모비딕』에서 진리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만 있다는 주장을 피력한다(참고 제23장 바람이 불어가는 쪽 해안). 고래는 이 진리의 바다를 누비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래 종, 특히 향유고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고래를 연구한다는 것은, 바다의 비밀을 더 많이 더 잘 알고 있는 존재를 연구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진리에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멜빌의 생각이지 않았을까.
5.
개인적으로, 에이해브의 작살을 제작하는 장면은 꼭 <일리아스>에서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만드는 장면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