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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Mar 17. 2021

레몬 번호 4958

하루 요리 일기-레몬 편

 매일 아침 친구와 8시에 기상하는 루틴 만들기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새벽 늦게 잠을 잔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작년에 코로나로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전혀 못했다. 올해는 온라인 팝업스토어를 열어보는 걸 생각하고 있다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려면 직무 동아리 프로그램에 신청해 예산을 끌어모아와야 다. 남의 돈을 가져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교에 정을 못 붙였던 내가 자진해서 돕겠다고 나섰다.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온라인 판매를 계획서에 바로 적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있어 자격증 취득과 레시피 개발을 최종 목표로 적고 너희가 그 과정을 잘하면 당당하게 온라인 스토어 판매를 해보겠다고 말하라고 하셨다. 주말에 알바를 끝내고 나서도 동아리 회장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제출할 계획서를 수정했다. 정말 계획서 같은 거 쓸 때마다 느끼는 건데 말을 고급지게 쓰는 게 어려운 것 같다. 간단명료하게 조사를 쓰지 않고, 하려는 말이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명 베이커리 방문-> 경쟁 업체 벤치마킹이라던가 식품 제조 공장 방문-> 기업 탐방이라던가, 단어 선택이 중요한 것 같다. 오늘까지 계획서 제출이라 우리가 조언을 구한 교수님께 컨펌을 받으려 이른 아침부터 학교를 나왔다.

우선 많이 찔러보고 지원해봐. 사업자 등록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많이 걱정하지 말고 업체 없이 지원서 작성해도 돼. 현금으로만 계산하거나 통장으로 입금하도록 유도를 한다거나 하면 돼. 그건 그때 가서 또 다른 사업이랑 연결시킬 수도 있어. 어휴 바보들아.


미련을 못 버리고 나중에 사업자 등록, 그놈의 사업자 등록을 몇 번이나 언급했는지 모르겠다. 며칠 째 친구에게 사업자 등록, 온라인 스토어를 이야기한 게 민망했다. 돈을 얼마나 벌려고 그러냐라고 교수님이 웃으셨다. 나는 돈을 버는 것보다 판매를 하던 안 하던 홈페이지 제작 같은 것을 해보고 홍보, 마케팅, 디자인 등을 배워보고 하고 싶었것이지만 굳이 아니요 그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뱉기엔 검열해보니 교수님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리 분야로 다양한 길이 있겠지만 조리학과에 중요한 건 조리실무능력이니까.


교수님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조금 걱정했던 것들이 사라지면서 또 다른 걱정이 들었다. 레시피 개발을 잘할 수 있을까? 레시피 개발을 잘해야 학교 앞에서 플리마켓을 하든  사업체를 찾아보든 뭐든 해보겠으니 당당하게 지원해달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교수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과연 당당하게 해달라고 말할 결과물을 낼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나도 내 실력이 못 미덥긴 하다. 그래서 뭐든 일을 크게 벌리기 무서워하고 누가 관심을 가져줄 때면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다. 교수님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찾아가고, 확인받고, 서슴지 않고 연락하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정말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생활을 열심히 했다면 어땠을까. 교수님이 친구처럼 느껴졌을까, 누군가에게 조언을 얻고 도움을 구하는 게 대단한 것 같다.  다른 애들은 동아리 활동 열심히 하면서 메뉴 개발이던 메뉴판을 만들던 생각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방법들을 배워나가고 조언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내 실력에 대해 더 조급함이 생긴다. 얼른 레시피 개발을 할 정도의 실력과 요리하는 자세들이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꾸준히 요리를 해야지. 그게 올해 내 목표다.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다. 글도, 요리도, 공부도 차근차근 서서히, 조급해하지 말고.

4958 레몬

그래서 오늘은 저번에 잼을 만들고 남은 레몬으로 레몬 커드를 만들기로 했다.  사실 버터 레몬 파스타를 만들고 싶었지만 언니가 자고 있었다. 냄새를 풍기고 큰소리를 내다간 언니에게 한소리 들을 것이다. 레몬을 3번을 씻었다. 동영상을 보면서  소금에 한번, 식초물에 한번, 베이킹 소다에 한번. 문득 레몬에 붙여진 스티커의 번호가 어떤 번호로 시작되느냐에 따라 무언가가 다르다는 글을 본 적 이 있던 게 생각났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3,4로 시작되는 건 농약을 뿌려서 키운 과일, 8로 시작되는 건 유전자를 조작해서 만든 과일 , 9로 시작되는 건 유기농 과일이라고 한다. 내가 산 레몬은 농약을 뿌려서 키운 과일이다.  냉동실에는 작년에 사두고 안 쓴 식재료들이 많다. 커다란 그라나 파다노 치즈, 크림치즈들.   냉동실에서 유통기한 지났지만(냉동실에 있었으니 괜찮겠지) 버터를 꺼내고 계란 2알, 설탕, 레몬 제스트, 레몬즙을 짜고, 처음 써보는 핑크 소금을 넣고 중탕하면 된다. 중탕을 하기 위한 내열 비커가 없으니 그냥 플라스틱 비커에 몽땅 넣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모든 것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얼어서 깡깡한 버터를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다. 참을성이 없는 나는 '이미 다 몽땅 집어넣었으니 그냥 해야지, 조금 오랫동안 하면 그래도 녹겠지' 마음으로 우선 그냥 했다. 레시피를 보고 해도 실패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일까, 아는 건데도 왜 멍청하게 행동하는지 나도 날 잘 모르겠다. 그렇게 복잡한 요리도 아닌데 1시간이 걸린 이유는 더 있었다. 사실 왜 플라스틱 비커로 하면 안 되는지는 몰랐다. 열을 못 이기고 깨지니까?  플라스틱이 녹으니까? 온도가 일정하게 전달이 안되니까? 아니면 온도가 너무 빨리 올라 익는 게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처음에 약불로 해두고 계속 저어도 아무런 변화도 없어서 비커에 살짝 손을 대보니 뜨겁기는커녕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중탕할 물을 적게 해서 그런 거구나 싶어 중탕의 물을 더 붓고 불을 살짝 세게 하고 계속 저었다. 계란이 익어서 분리되면 안 되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또 변명을 덧붙이자면 불의 열기가  뜨거워서 오븐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중탕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10분이면 농도가 잡힌다는데 20분을 젓고 있어도 여전히 물 같은 농도이길래 그때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비커 안에 있는 레몬 커트를 손으로 살짝 찍어 온도를 체크했다. 젠장. 미적지근했다. 문제는 온도 전달이 안된다는 거였다는 것이다. 결국엔 스텐볼에 옮겨서 중탕을 시켰더니 그제야 농도가 되직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오랜 시간 따뜻한 물에 중탕해서 버터는 녹았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것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크림화 상태로 만들지 않고 꽁꽁 언 버터를 불에서 녹여 사용해서 버터 알갱이들이 옥에 티처럼 눈에 밟혔다. 그래도 완성된 레몬 커드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니 맛있었다. 레몬 타르트 필링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고 스콘에 올려서 먹어도 맛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라고, 자신이 경험해보는 게 중요한 거라는 생각 했다. 최근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텃밭 가꿀 일이 생기면서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밭의 지름은 몇 미터인지, 분명 초등학교 때 배운 것들인데 써먹지 못했다. 대충 숫자들과 기호들은 기억이 나는데 이것을 전혀 써먹지 못해서, 나는 내가 영양가가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활의 지혜이던 지식이던, 계속 갈고닦고, 생활에서 많이 활용해 봐야 배운 것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고. 배웠던 지식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완성한 레몬 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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