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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Candy Dec 02. 2023

영화 [서울의 봄] 을 보고

그 앞에서 느껴지는 무력감과 패배감

'답답함',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영화


영화 [서울의 봄]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군사 쿠데타를 다룬다. 역사적 사건에 기반한 영화인 만큼, 팩트와 허구에 대해 조목조목 짚으며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많지만 이미 그런 글들이 많이 보여서, 여기에서는 소위 '어떤 영화를 다 보고 무기력함을 느낄 때' 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불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관객에게 드러내는 영화는, 영화라는 컨텐츠 특유의 감정적 고조와 극적 연출과 결합되어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더욱 진한 농도의 찝찝함을 느끼게 한다. 예컨대 [내부자들], [국가부도의 날], [서울의 봄]이 그러하다. 


[내부자들] 에서는 정치세력과 기업인, 더하여 언론인 간의 결탁과 부정의를 드러낸다. [국가부도의 날] 에서는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본인들의 책무를 망각한 채 사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다양한 주체들의 비윤리성을 엿볼 수 있다. [서울의 봄] 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숭고한 명제를 너무 손쉽게 유린하는 군부세력과, 그에 맞서 정의로운 원칙을 고수하던 개인들이 그보다 더 손쉽게 바스라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가?


가장 핵심은 불편한 현실을 눈앞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내가 어찌 손쓸 방도가 없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깨닫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와 관련된 개념을 '정치 효능감(Political efficacy)' 이라고 한다. 자신의 어떠한 행동이 현실의 정치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믿음 혹은 감각을 의미하는데, 쉽게 표현해서 정치현실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이다. 정치 효능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정치적 상황이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낮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전혀 의미없거나 미미하다고 생각한다.

툭 까놓고 말하자. 사회의 불편한 단면을 꼬집는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찝찝하고 무기력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치, 내가 받는 돈, 혹은 예견되는 나의 미래를 이리저리 고려했을 때 그러한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예 없거나 거의 없을 것 같다는 감각으로부터 파생한다. 



그러한 감정은 타당한 것인가?


타당하다고 본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된다는 지배관념인 민주주의가 처음 싹튼 곳은 고대 그리스였는데, 당시 그리스에서는 수많은 폴리스(Polis)들이 생활의 단위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국가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보다 작고 폐쇄된 집단인 폴리스가 통치의 단위였던 것이다.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시민(Citizen)들의 운명은 폴리스의 운명과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폴리스가 약해지면 내 삶이 약해지는 것이고, 폴리스가 굳건해지면 나의 삶 역시 굳건해지는 것이며, 폴리스가 다른 폴리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내 집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즉 폴리스와 시민들은 말 그대로 '운명 공동체' 였으므로, 그토록 중요한 폴리스의 결정과 방향을 그들 손으로 직접 결정해야만 했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발아한 원인들 중 하나다. 그들은 거의 모든 것을 시민들이 직접 결정했다. (당시 시민의 개념은 현재 국민의 개념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국민으로서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이론적으로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국회의원에게 직접 전화나 이메일 보내기, 온라인 및 오프라인에서의 시위, 피선거인으로서 직접 정치인이 되기, 투표 등의 방법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거대한 정치현실에 직접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각각 4년, 5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작디작은 투표용지 한 장 뿐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거대한 호수에 머리카락 한 올 정도 올리고 나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일상의 공간에서, 온라인 공간에서, 어떤 영상의 댓글에서 불만이나 지지를 보내는 것 외에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해 보라. 우리가 느끼는 0에 가까운 정치효능감은 매우 타당하고 일리있는 감정이다. 



그럴 수 있다고 해서, 현상유지가 괜찮은 것은 아니다


무기력감과 낮은 정치효능감을 느끼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정치에는 관심없고 어차피 다 똑같은 놈들이 지들끼리 해쳐먹는 거 관심없다는 식의 정치적 냉소주의까지 이어지는 것은 문제다. 어떤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을 충실히 반영한 행위까지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누굴 한대 때려주고 싶은 감정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지만, 그것을 발현하는 행위는 옳고 그름의 판단대상이 된다. 


시민이라고 함은 국가로부터 의무를 부과받는 동시에 권리 또한 부여받는다. 젊은 남성들이 팔팔한 나이에 머리 빡빡 밀리고, 비슷한 놈들이 열댓 명씩 모여 있는 내무반에 억지로 밀어넣어져서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거주이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비롯한 헌법 상의 기본권리를 제약받는 것은, 그것이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에게 국가가 부과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놀고 싶은 마음, 자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어 두고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의 일부를 매번 꼬박꼬박 국가에 내고,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즉각 처벌받는 것은 납세가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국민이 가지는 권리이자 동시에 부과된 의무라고 본다. 그래서 '정치에는 솔직히 관심 없어' 하는 사람을 보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 속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정치는 그대의 삶 그 자체이다. 정치라는 것이 대한민국 여의도에서 발현될 때 보이는 현상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국회의원들은 매일 지들끼리 싸움밖에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정치 자체를 등져버릴 변명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은 그냥 게으르거나 무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들의 의지나 목소리가 모여 사회와 제도가 변화한 사례는 우리 근처에도 충분히 있다. 2015년부터 2023년 사이에 발생했던 여러 사회적 흐름이나 변화의 순간들을 뜯어보면,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으로부터 시작된 위로부터의 변화보다 일반 시민들의 의지와 그것을 증폭시키는 기폭제의 결합으로부터 비롯된 물결이 많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는 직접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 소규모 공론장의 확대, 정치적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시민들의 의견이 닿을 수 있는 효과적인 창구 마련 등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무기력감의 해소를 시도할 수 있다. 작은 개인으로서는, 결코 본인이 무엇인가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놓아버리지 않는 동시에 다양한 정보를 성숙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계몽된 시민이 되는 것이 진심으로 중요하다고 믿는다. 해서 언젠가 개개인들의 목소리가 사회를 바꾸는 데에 진정으로 필요해지는 순간이 왔을 때, 크고 작은 선택들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심적, 실질적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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