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독한 년!’, ‘병신 같은 년!’ 고함을 지르면서 연신 나의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기는 아버지. 울음 섞인 말도 없이 그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견뎌냈다. 아버지에게 그 어떤 가치도 느끼지 못하여 그랬는지 아니면 진짜 독했는지 엄마가 집을 나간 후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몇몇 이웃들은 내가 벙어리가 된 걸로 소문을 퍼뜨렸다.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 편했다. 더 이상 시시콜콜한 얘기를 묻지 않을 테니 말이다. 불우했던 열 살. 지금도 먹먹한 그 소녀의 마음. 누군가는 그 시절에 누구나 그랬었다고 어이없는 얘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충분히 해코지할 수 있는 나쁜 마음도 가지게 된다. 용서하지 않았다. 아직. 그리고 앞으로도.
허기를 달래려 주먹밥 하나를 보따리에서 빼려는 순간 누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얘야.’ 짧은 목소리에 놀라 보따리를 추슬러 도망을 쳤다. 그냥 무서웠다. 대합실 밖으로 달려 눈에 들어오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이 너무 휑하였다. 맨 마지막 칸으로 얼른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날 부르던 그 어른일지도 모른다. 발소리가 짧다. 숨소리도 참았다. 곧 버스가 올 텐데 이 상황이 곤욕스럽다. 집을 나간 엄마가 혹시 다시 나타날까 이 버스터미널에 일주일에 두어 번 왔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대구행 버스를 타던 엄마의 모습을 봤다는 얘기에 지금 숨죽여 화장실에 숨어 그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마 조금 전 들어온 그 어른은 뒷집 조 씨인 것 같다. 이제야 목소리가 기억이 났다. 노름판에서 아버지와 둘도 없는 경쟁자여서 들키면 아버지에게 일러바칠게 분명하다. 문을 열려고 한다. 난 문을 두드리며 쉰 헛기침을 했다. 벙어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나를 오인해서 본 걸로 착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짧은 발소리가 이내 화장실 밖으로 사라졌다. 화장실 출입구가 하나여서 혹여 조 씨가 볼까 화장실 좁은 창문으로 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하필 이런 상황이 생길게 뭐람. 화장실 외벽 모퉁이에서 대합실 입구에 허리를 숙여 히죽대는 조 씨를 관찰할 수 있었다. 주먹밥은 버스를 탄 후에나 편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먼발치의 그를 응시하며 버스 한 대가 들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버스가 대구행 버스이길 바라며 차표를 손에 쥐고 정차하는 버스 뒤로 조 씨를 피해, 타려는 사람들 속에 뒤엉켰다. 만일 조 씨가 탄다면 낭패다. 저 사람은 왜 여기 왔을까? 잠시 방심한 사이 조 씨가 한 여인과 말을 썩으며 먼발치에서 지나갔다. 다행이다. 나를 못 봤을 것이다. 누구처럼 여자에 빠져 주위를 둘러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나를 안심시키며 차에 올랐다. 버스 안 중간 지점을 지나 길의 반대편 창가에 자리 잡고 밖에서 나를 못 보게 좌석 끝 부분에 허리를 뉘며 앉았다. 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빨라진 심장 박동 수는 멈추질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나지막이 대구행 버스가 맞는지 확인했다. 맞다. 차 출입문 닫는 소리가 엄청 거슬린다. 버스는 처음이다. 차를 타는 것이 처음이다. 이제 앞으로의 모든 것이 처음이다.
여섯 살 때 오빠와 남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 집을 뛰쳐나오기까지 근 5년 동안 아버지의 못됨과 날 버린 엄마가 어둑해지는 차창 경치 너머로 계속 지나쳐 가고 있다. 두렵고 무섭지만 이 버스를 잘 탔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계속해서 아버지, 엄마를 싫어할 수 있으니. 싫어해야만 한다. 나에게 이런 두려움과 슬픔을 줬으니. 지금의 가슴은 그때를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