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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자, 그리고 그 아이

혹, 개명했을까?

by 춤추는 금빛제비

평소 즐겨 찾는 관심작가 한 분의 글을 읽다가 멈췄다.

‘하루꼬’라는 단어 속, ‘춘자’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이름 하나가 나를 단숨에 국민학교 5학년 교실로 데려다 놓았다.
열두 살, 사춘기 문턱이었다.

그땐 한 반에 70명이 넘게 몰려 앉아 오전·오후반으로 나눠 공부했다.

학기 초마다 선생님은 가정조사를 했다.
“집에 TV 있는 사람? 냉장고 있는 사람? 자동차 있는 사람?”
어린 마음에도 주눅 들게 하는 그런 걸 왜 물으셨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시대였다

내 짝은 춘자였다.

동네 문방구집 넷째 딸.
쌀쌀맞은 성격에 잘 웃지도 않았지만, 운동만큼은 남자애들도 가뿐히 이길 만큼 정말 잘했다.

운동회가 열리면 늘 학년 대표 릴레이 선수로 맨 마지막에 달리던 아이.

못생긴 건 지나 내나 쌤쌤(?)인데 둘이 함께 앉는 책상에 휴전선도 아닌 선 긋어놓고 살짝 넘어가면 그 째진 눈으로 흘겨보던ᆢ

그래도 나는 공부로, 춘자는 운동으로, 서로 다른 자리에서 반짝였다.

그 무렵 교실에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외면받던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국제결혼이 흔하지만, 그 시절엔 달랐다.
혼혈이라 하면 대부분 미군과 술집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편견은 벽처럼 두꺼웠다.

우리 반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내 평생 아직도 그 애처럼 희고 예쁜 얼굴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짝이 되려는 아이도 없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 아이와 있으면 편했다.
숙제를 같이 하고, 모르는 문제를 가르쳐주며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그러다 다시 짝이 바뀌고, 춘자와 나란히 앉게 된 어느 날이었다.
춘자가 크레파스를 잃어버렸다며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벼락같이 그 혼혈 친구를 가리켰다.

"누가 도둑놈인지, 난 딱 봐도 알아."

순간 교실은 얼어붙었다.
아무도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열두 살의 나조차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그때만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증거도 없이 그러면 안 돼. 너무 심하잖아.”

며칠 뒤, 진범은 다른 아이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미 그 친구는 너무 큰 상처를 입은 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교실에서 사라졌다.
아마 술집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돌아보면 그건 첫사랑도 아니었고, 대단한 사건도 아니었다.
그저 열두 살, 하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정의감’이란 말을 가슴에 새겼다.

아이들 틈에서 힘없이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리던 그 친구의 얼굴.

그건 분명 폭력이었다.

빛바랜 오래된 교실의 풍경이지만, 지금도 내 안에 선명하다.

춘자야, 혹 옛 친구들과 연락 닿아 반창회 나오면…
너도 촌스럽다고 싫어했던 이름.
나는 더 '힘차고 우렁차게' 불러줄 거다.

춘자야 ~ 안녕.

죽었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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