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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Mar 21. 2022

호주 과학자와 맨해튼 프로젝트

촉진자 역할로 강대국에게 인정받다.

미국이 세계패권을 잡도록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인슈타인이나,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 영웅을 대부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촉진자 역할을 맡은 호주인 덕분이었다. 호주 물리학자 마크 올리펀트(Mark Oliphant)의 도움을 받은 미국은 제때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고, 과학혁신을 이뤄 원자폭탄을 실전배치할 수 있었다.


마크 올리펀트(Mark Oliphant, 1901-2000)


미국에 원자폭탄 가능성을 알려준 호주 과학자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먼저 찾아낸 건 영국인들이었다. 그들은 마우드 위원회(Maud committee)를 조직해 영국이 핵무기를 만들 역량이 되는지 조사했고, 2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 핵무기를 만들수 있다는 결론이 담긴 마우드 보고서(Maud Report)를 작성한 것이다.

마우드 보고서(Maud Report, 1941)

마우드 보고서는 원자폭탄의 원활한 개발을 위해, 미국에게도 원자폭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서로 과학 협력할 것을 제언하였다. 영국은 공식 루트로 마우드 보고서를 보냈으나, 이상하게 미국의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미국과의 과학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호주 물리학자가 미국으로 떠난다. 그는 마우드 위원회 위원인 마크 올리펀트였다. 올리펀트는 미국의 과학자들에게 마우드 보고서의 존재를 아는지 묻고, 왜 원자폭탄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 우라늄 위원회 위원장인 라이먼 브릭스(Lyman Briggs)가 원자폭탄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시 미국 우라늄 위원회는 원자력 발전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가능성이 알려지게되면, 미국의 과학연구의 초점이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로 맞춰지며 라이먼의 원자력 발전 연구 프로젝트가 종료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올리펀트는 미국과 영국의 원자폭탄 개발협력을 위해, 실무자들을 만나, 마우드 보고서의 내용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국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깨달아 연구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올리펀트가 전파한 정보는 루즈벨트에게도 보고되었고, 루즈벨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할 것을 명령하였다.



망명한 독일 과학자의 연구성과를 영국에 전파하다

그런데 올리펀트는 단순히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에 기여만 한 인물은 아니다. 영국이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2차 대전 직전 독일의 유태인 사냥을 피해 영국으로 탈출한 과학자들중에 핵분열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물리학자 오토 프리슈(Otto Frisch)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국에서 핵물리 연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적국의 스파이로 의심받던 그에게 손을 내민사람은 영국에서 일하는 호주 과학자 올리펀트였다.

오토 프리슈(Otto Frisch, 1904-1979)

프리슈는 임계질량을 정의하고 원자폭탄의 폭발규모를 추정한 보고서를 올리펀트에게 건냈다. 영국의 주요 과학자들이 독일 출신인 프리슈와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리펀트가 프리슈의 보고서를 상부에 보고하자 영국에서는 마우드 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미국 보다 먼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찾아낸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촉진자 역할 : 미국과 영국의 러브콜을 받다

올리펀트의 촉진자 역할 덕분에 미국과 영국의 원자폭탄 연구가 신속하게 수행될 수 있었다. 올리펀트는 독일 과학자의 연구성과와 영국을 이어주었고, 영국 과학자의 연구성과와 미국을 이어주었다. 핵분열 현상을 최초로 발견하고 증명한 것은 독일이었으나, 영국과 미국은 독일을 앞설 수 있었다.


따라서 미영 양국은 올리펀트를 필요로 했다. 그는 영국의 마우드 위원회에도,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호주에는 첨단 과학 인프라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펀트는 강대국이 배타적으로 진행하는 과학연구에 대한 정보를 일정부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2차 대전 당시 호주가 가진 하드파워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호주의 과학역량을 발전시키다

전쟁이 끝난  올리펀트는 호주의 과학 발전을 워해 호주 국립대(ANU) 창설을 주도하였다. 자신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깨달은 과학 지식을 호주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호주에 세계 최대 호모폴라(Homopolar) 발전기를 설계하건설하는데 기여했다. 호모폴라 발전기는 대규모 레일건에 동력을 공급했고, 호주인들은 이를 통해 여러가지 과학실험을   있었다.

호주 과학 아카데미(Australian Academy of Science)

올리펀트는 과학분야에서 호주인의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학계를 만들기 위해 동료들을 모집했다. 전국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들을 모아 호주 과학 아카데미(Australian Academy of Science)를 창설한 것이다. 호주 과학 아카데미는 호주 과학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그들이 국제 과학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중이다.


호주의 과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올리펀트를 호주인들은 감사하며 기억하고 있다. 2000년 그가 타계하자, 존 하워드(John howard) 호주 총리는 연설을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 평생 올리펀트가 세운 학문적 업적과 핵의 평화적 이용에 헌신한 그의 열정은 후학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었습니다.

호주 국민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공직자로서의 모습 또한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 호주 제 25대 총리, 존 하워드



한국의 촉진자 역할을 공상하다.

미래 다가올 기술동맹에서 호주는 2차 대전의 기억을 되살려 다시금 촉진자 역할을 수행할 것 같다. 그러나 21세기 첨단 과학은 너무나 복잡하다. 따라서 호주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촉진자 역할을 잘 수행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앞으로 한국도 호주와 함께 과학의 촉진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어떨까? 다른 국가가 필요로 할 과학정보를 공유하여, 우리와 연대하는 국가들의 과학발전이 원활히,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하드파워를 뛰어넘어 새로운 과학지식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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