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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복 Oct 30. 2022

소설 환취 (15화/25화)

15. 시험

15. 시험      


 밤새 혼자서 그 난리법석을 피우는 동안 허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녹초가 된 상태로 앉아있으니 슬슬 배가 고파지더군요. 서랍장 위에 꺼내놓은 야식들이 있었지만, 퇴근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시 가방에 넣어두었어요. 먹을 시간이 있었더라도 안 먹었을 거예요. 퇴근하다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과 막걸리를 사 가지고 여관방에서 축하 만찬을 즐긴 다음, 후련한 마음으로 긴 잠을 잘 계획을 이미 세워 놓았었거든요.     


 퇴근시간에 맞춰 회사 입구를 빠져나올 때는, 마치 인생에 큰 시험을 무사히 잘 치르고 나온 수험생의 홀가분함마저 느껴지더라고요. 걸어가면서 마주치는 직원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며 "역주행 길"을 벗어나면 그만이었죠. 하지만 저를 위한 진짜 시험은 회사 입구를 빠져나가서야 시작되었어요.     


 '랄라 랄라' 신나고 즐거운 퇴근길의 담배 한 개비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을 때였어요. 갑자기 역한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 들어오면서 '우웩!' 하고 헛구역질이 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비싼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죠. 이미 아는 냄새였어요. 땅콩이 잔해가 있던 곳에 가까이 갔을 때 맡아졌던 바로 그 냄새였거든요. 전 인상을 찌푸리면서 코에 손을 갖다 대 재차 확인했어요. 그런데 손뿐만이 아니었어요. 팔에서도, 어깨에서도, 들고 있던 담배, 라이터, 심지어 저의 숨결에서도 그 냄새가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건 분명 저한테서 나는 냄새였어요. 제가 땅콩이의 잔해를 만지거나 직접 치운 것도 아닌데, 그 냄새가 밴 게 이해되지 않았죠. 잠시 선 채로 지난밤의 일들을 되짚어보면서 어떻게 냄새가 배게 된 것인지 찾아보려 했어요.

    

 그러던 중 멀리서 출근하는 직원들이 걸어오는 게 보이더군요.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크게 뛰기 시작했어요. '직원들이 나한테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들었거든요. 야근하던 젊은 직원이 땅콩이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겪었던, 출퇴근 길의 노이로제가 다시 발동되는 게 느껴졌어요. 냄새에 대해서든, 땅콩이에 대해서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든 무조건 숨겨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그래서 태연하게 평소처럼 걸어가야 한다고 자기 암시를 한 다음, 피우려던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직원들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제 심장박동이 점점 더 커지다가, 결국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서 들릴 정도가 되더군요. 출근하는 직원들의 무리와 마주쳤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빠르게 예상했어요. 이 냄새 때문에 코를 움켜쥐고 피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무슨 냄새가 난다며 이야기할 수도 있고, 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며 지나갈 수도 있고, 냄새가 나는 이유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서 청소를 했다거나, 야식 먹다 음식물을 쏟았다거나, 밤에 들어온 사고 차량에서 나던 악취가 몸에 배었다는 등의 대충 얼버무릴 변명 몇 가지를 빠르게 만들어 냈어요. 그런데  정작 직원들에게 인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거리에 다다랐을 땐, 미리 예상했던 상황들은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지고 '이미 모든 걸 직원들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하더군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분명 알고 있을 거다.'     


 제 의지와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가는 걸 자각하곤 있었지만, 이미 시작된 착각은 그럴듯한 이야기까지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맞다. 직원들은 집에서 원격으로 CCTV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밤새 날 지켜보고 있었을지 몰라. 아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아니다. 그랬을지도 몰라. 또 그 젊은 직원일까? 뭐지? 이젠 냄새 때문에 잘리는 건가? 도대체 뭐지?'

     

 머릿속에서 혼자 갑론을박 전투를 벌이던 중, 어느새 직원들의 무리가 제 코앞에 이르렀고, 그런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였어요. 마치 한 명씩 저에게 '왜 그랬어! 왜! 왜!'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러자 '역시 다 알고 있구나.'란 착각이 의식적으로 잡고 있던 얼굴 근육을 모두 풀어버리고, 절 순식간에 울먹이는 표정으로 만들어 버리더군요. 그리고 그 상태로 전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면서 이상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어요. 


"나… 나 아니에요. 나 아니라고요. 왜… 왜…."


 제 의지와는 다르게 나오는 말투로 이상한 말들을 반복해서 토해내는 동안, 직원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절 쳐다보고 있었어요. 절 똑바로 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순간 무서웠어요. 그들의 시선을 피해 바쁘게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어요. 그러다 하늘에 떠있는 아침 해가 시야를 스쳐갔어요. 떠올라 있는 아침해를 눈으로 확인하고, 상황을 다시 인지했어요. 전 일을 마치고 퇴근 중인 사람이었다는 것을요. 근무는 끝난 상태였고, 회사 밖이었어요. 전 입을 꾹 다문 뒤, 놀란 모습으로 절 쳐다보는 직원들의 얼굴을 한번 훑어내듯 보았어요.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천천히 뒤돌아, 그들을 뒤로한 채 여관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어요. 


 여관방에 들어서자마자 숨 고를 틈도 없이 급히 옷을 다 벗고 욕실로 향했어요. 여러 번 온몸을 비누로 씻으면서 "이게 뭐야! 이게 뭐야!"라며 큰소리로 같은 말을 계속 외쳐댔죠. 그런데 욕실에서 울리는 저의 말은 다시 '이게 뭐긴! 이게 뭐긴!' 하는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어요.      


 한참을 씻고 나오니 비누냄새 덕분인지 냄새가 잠시 멈추는듯했어요. 그대로 탈진한 상태로 옷도 안 입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그놈의 고양이, 그놈의 고양이 때문에….'라며 땅콩이에 대한 원망을 하던 중 방금 씻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그 냄새가 손에서부터 나기 시작했어요. 이번엔 베개로, 이불로, 방안에 있는 모든 옷가지로 그 냄새가 번지더군요. 탈취제를 집어 들고 방안에 안개를 만들 정도로 뿌려대다 확실하게 모든 걸 세탁하기로 했어요.     


 전 사소한 문제 한번 일으킨 적 없이 계속 같은 방에서 얌전히 잘 지내왔던 터라, 여관 사장님께서 저를 상당히 좋게 보고 계셨어요. 사장님도 저에게 특별히 신경 써주시곤 하셨고요. 장기방 거주자가 방을 빼면서 버리고 간 신발장이라든가, 밥상, 옷걸이 등 쓸만한 가재도구들이 생기면 챙겨주셨었죠. 여관 장기방에서 잘 지내는 법은 따로 없었어요. 사장님께 잘 보이고, 제때 방세를 잘 내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되는 거였죠. 그래서 제 여관 생활에 따로 지적을 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장기방 거주자들이 사용하는 유일한 세탁기를 하루 종일 돌리고 있으니 사장님이 나오셔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보시더군요.


"자네 방 빼나? 무슨 빨래를 하루 종일 해."


"아닙니다. 일하다 무슨 냄새가 배었는지 옷가지랑 침구에도 냄새가 나서 세탁하고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세탁기 옆에 잔뜩 쌓아놓은 빨랫감을 집어 냄새를 맡아보시더니,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말씀하셨어요.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혹시 코가 잘못된 거 아니야? 밤새 일하느라 피곤해서 그럴 수 있으니까 방에 들어가 좀 더 쉬어 봐."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남은 빨랫감에 코를 대어봤을 때는 여전히 역한 냄새가 나고 있었어요. 사장님 눈치도 보여서 더 이상 여관의 공용 세탁기를 쓰기엔 무리일 것 같더군요. 그래서 세탁할 것들을 챙겨 보따리 짐을 싸서 셀프 빨래방까지 다녀왔지만, 냄새는 불규칙하게 나기를 반복했어요. 그리고 항상 손에서 시작에서 몸으로, 그다음은 제 주변의 물건들로 불이 번져나가듯 냄새가 퍼졌어요. 사라질 때는 안개가 걷히듯 냄새가 배었던 모든 곳에서 일시에 그 농도가 옅어지기 시작했고요.


 다음날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출근 준비를 해야만 했어요. 걱정이 되더군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저의 냄새를 맡게 될까 봐 위축되는 마음이 들었고, 지난 퇴근길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물어볼 것 같아 심란한 상태였거든요.


 경비실에 앉아 근무를 시작하니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던 최 과장님이 경비실에 방문하시더군요. 전 그저 '결국 올 게 왔구나….'란 생각만 들었죠. 어떤 대화가 시작되든 저에게 불리한 결과만 있을 거라 예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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