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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복 Oct 30. 2022

소설 환취 (20화/25화)

20. 유종의 미

20. 유종의 미     


 한 장의 문서엔 서비스 센터와 용역회사 간의 계약이 종료되어 30일 뒤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고, 저와 함께 할아버지 경비원분의 서명란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어요. 회사 간의 용역계약 만료에 따라 근로자의 근로계약까지 연달아 만료되는 상황이었죠. 할아버지 경비원분께 전화로 먼저 알려드려야 했어요.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큰 사건이라 그런지 같은 일을 하는 분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런데 전화를 드려 문서에 적혀있는 내용을 설명드리니, 나직이 "허허허" 하고 웃으시곤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조만간 이럴 것 같았어요. 문 주임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 않았나요?"

     

"네, 조금 불안한 마음은 있었습니다."


 언젠간 닥칠 일이었어요. 이미 직원들의 절반 이상이 인근의 신규 서비스 센터로 발령받아, 자연스레 일도 인원도 줄었고 용역 직원의 철수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지금도 사회 어디에서나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고요. 간간이 들어오던 수리나 정비가 필요한 차량들도 대부분 새로 생긴 서비스 센터에서 수용하는 바람에 야간 근무 중 차량이 안 들어온 지도 한참 지난 상태였어요. 경비원뿐만 아니라 주차와 세차 그리고 미화 담당 용역 원들도 철수 또는 감원 대상이었고요. 언젠간 짐을 싸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간단하게 종이 한 장으로 끝나버리는 건 허무하더군요. 물론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은 아니었지만요. 할아버지 경비원분은 저보다 오래 일하셔서 크게 실망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절 위로하려 하셨어요.     


"문 주임, 아니… 문 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문 군이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아직은 직장에 몸담고 있으니까 나중에 밖에서 만나게 되면, 말은 그때 편하게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문 군도 참 성실하게 잘해줘서 나도 많이 고마웠어요. 우리가 이렇게 그만두지만 남은 한 달, 이제 할 수 있는 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뿐이에요. 마지막 발자국이, 다음 발걸음을 위한 시작이라고도 하잖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

     

"네, 알겠습니다. 평소 하던 대로 그리고 무사고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런 것도 중요해요…. 그나저나 나야 이제 늙은이라 상관없지만, 문 군은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아! 네, 조금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몇 달은 더 고용유지를 해준 것 같습니다. 인건비를 더 들일 이유가 없어지면 중간에 해고하거나 근무시간을 줄이거나 하는 곳도 많이 겪어 봤습니다."


"그래요. 아마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겠거니 하고 최대한 사정 봐준 거라 생각해요. 그럼 우리도 더 바라지 말고 정리하는 게 맞아요. 문 군은 다음 일자리도 고민이 많아지겠네요."


"네, 아직 시간은 있지만 막막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어려운 것을 마주했을 때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고, 힘을 내고 맞서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지금은 받아들이고 마무리를 잘해야 되는 때가 맞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류는 서랍에 넣어두겠습니다. 서명란만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둘 다 마지막까지 잘해봅시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를 "문 군"이라고 부르는 음성이 참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저도 중년이라 "문 씨"나 "문 씨 아저씨"로 불릴 법도 한데 "문 군"이라는 호칭을 들으니 제가 젊은 청년이 된 것 같았고요. 하긴 할아버지 경비원분의 입장에선 제가 자식뻘 나이라, 그분의 눈엔 제가 청년 정도로 보이셨을 거예요. 그래도 같은 상황에 처한 분과 이야기라도 나눠서 그런지, 갑작스레 요동쳤던 마음이 진정되더군요.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선, 진정이 되다 못해 공허한 느낌마저 들었어요. 무언가 순식간에 비워진 것 같았죠. '세상 다 그렇지 뭐.' 하며 수긍은 이미 했지만요. 퇴근 후 잠을 자고 일어나니, 용역업체에서 전화가 오더군요. 전화를 받자마자 용역업체 담당자분은 죄송하다는 말부터 하시더라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열심히 해주셨는데 업체 간 사정 때문에 재계약을 못 하게 되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야간에 차량이 들어오는 일도 거의 없어진 데다, 문제가 생기면 외부 경비업체에서 살피러 오기 때문에 야간 경비원은 따로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관리하는 다른 업체에 지금 결원이라도 있으면 거기 넣어드리면 되는데, 지금 자리가 다 꽉 차 있어서… 현재는 자리가 없더라고요. 나중에라도 혹시 자리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경비원분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면, 그분 알선 먼저 해주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저보다 갈 곳이 더 없으실 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두 분 친하셨나 봐요. 그분도 정말 오랜 시간 열심히 해주셔서 어떻게 말씀을 드릴지 고민이네요."

     

"제가 통화를 해보니 이미 예상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한테 마지막까지 잘하자고 말씀해 주셔서 괜찮으실 겁니다."

      

"역시 그분이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이해심이 깊으신 것 같아요. 원래 저희가 정한 정년은 이미 넘으셨는데 이쪽 회사에서 계속 업무를 맡기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이번엔 일이 이렇게 됐지만 다음에 좋은 자리 생기면 두 분께 꼭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퇴직하고 유니폼과 순찰 장비는 택배로 반납하겠습니다. 좋은 자리였는데 채용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신경 못써드려서 죄송할 따름이죠. 남은 급여랑 퇴직금 정산 같은 건 빠르게 처리해 드릴게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용역 업체 담당자도 젊은 청년이었는데 마음 쓰는 건 저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졌어요. 다른 곳에 자리가 생기면 연락 주겠다는 건, 그저 인사말 정도로 받아들였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리가 생겨서 연락을 준다면, 할아버지 경비원분이 먼저 하시는 게 나았어요. 어차피 이제 오래 일하실 수도 없으실 테니, 얼마간이라도 더 버셔야 막바지 노후 준비를 조금 더 하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퇴사 예정일을 달력에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시해 두었어요. 여전히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냄새 때문에 매일 신경이 곤두서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일을 그만두고 쉬면 괜찮아 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한편 생기더군요. 그런데 마지막 근무 날이 다가올수록 "유종의 미"를 다짐하던 초반과는 다르게 많이 해이해지더라고요. 비번인 날은 분홍이를 앞에 두고 방 안에서 술을 마시기 일쑤였죠. 평소에 반주 삼아 한두 잔씩 마시던 막걸리도 순식간에 늘어버렸고요. 만취 상태가 될 때까지 마시다 잠들곤 했어요. 어느 날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렇게 쉽게 끝날 걸 왜 그리 집착했는지 제 자신이 한심하더라고요. 정규직도 아닌 데다 원래 이렇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요.


 그리고 땅콩이가 자주 떠올랐어요. 하지만 이제 볼 수도, 먹이를 줄 수도 없었죠. 그러다 '간단하게 제사라도 혼자 지내줄까?'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어요. 땅콩이의 영혼도 위로하고 저도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요. 술김에 떠오른 생각이지만 상당히 괜찮은 것 같았어요. 그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최선의 정답으로 보였고요. 그런 생각을 한 제 자신이 순간 기특했어요. 그러면서 "그래! 위령제 좋네."라고 혼잣말을 내뱉었을 때였어요. '그렇지!' 하고 분홍이가 오랜만에 저에게 맞장구를 쳐주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술에 취해서 잘못 들었거나 이웃한 방에서 넘어온 소리일 수도 있긴 했어요. 그래도 상관없었어요. 여관 방구석 술자리에 마주 앉아있던 분홍이를 끌어안고, 이마에 뽀뽀를 해대며 기뻐했어요.

      

"역시! 우리 분홍이는 날 알아주는구나!"

      

 제가 찾은 정답에 확신을 더해준, 분홍이가 마치 저의 수호천사 같았어요. 분홍이를 껴안고 누운 채 위령제에 대한 계획을 세웠어요. 그리고 그대로 술에 취한 채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분홍이도 저에게 시험을 낸 출제자와 한패였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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