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가장 머물러 보고 싶었던 곳은 토스카나 지역이었다. 로마가 생각보다 좋아서 깜짝 놀랐지만 원래는 비행기 편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들러야만 하는 지나가는 도시였고, 토스카나의 포지본시라는 도시에 9일 동안이나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나는 포지본시라는 도시는 평생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지만 피렌체가 너무 가고 싶은데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어쩔 수 없이 피렌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포지본시라는 도시로 예약하게 되었다.
로마 여행을 마치고 시에나에 잠시 들러 관광을 한 후 본격적으로 우리의 에어비앤비가 기다리고 있는 포지본시를 향해 출발했다. 포지본시는 피렌체에 관광 온 사람들이 산 지오마니에 가기 위해 버스를 환승하는 도시이다. 어떤 블로거는 ‘별 볼 일 없는 도시’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별 볼 일 없다는 도시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시에나에서 포지본시까지는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를 타고 포지본시 정류장에서 내려 한 5분 정도만 걸어가니 바로 숙소였다. 우리가 도착하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왔지만, 곧 에어비앤비 주인인 리사가 나타나 열쇠를 건네주며 집 이모저모를 설명해 주었다.
리사가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숙소는 한마디로 ‘home’이었다. 가끔 어떤 숙소에 가면 내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곤 하는데 이런 기분 때문에 특히나 장기 여행을 할 때는 호텔이 아니라 에어비앤비를 예약한다. 그렇다고 모든 에어비앤비가 내 집 같은 것은 아니다. 운이 좋게 몇몇 에어비앤비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리사의 집이 딱 그랬다. 널찍한 침실에 퀸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고 다이아몬드 무늬의 깨끗한 분홍색 이불과 빨간색 커튼, 그리고 노을 지는 아프리카 초원이 그려진 붉은 그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독특한 모빌 두 개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거실 한쪽 벽에는 알록달록 퀼트로 만든 천이 벽에 전시되어 있었고 아래 2인용 소파가, 그리고 작지만 있을 것 다 있는 주방이 펼쳐졌고, 주방 공간에 2인용 식탁,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이 마련이 되어있었다. 벽에는 코끼리, 만다라, 나비 등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길쭉한 주방을 지나 문을 하나 열면 세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문을 하나 더 열면 테라스가 나오는데 이 테라스는 주변 아파트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닥은 오렌지빛, 그리고 테라스 벽과 창고의 벽면은 레몬색으로 환하게 칠해져 있었다. 가운데 해바라기 모양의 식탁보가 씌워진 4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고 테라스를 주위는 꽃들로 장식해 놓았으며 여러 식물들이 심어진 화분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뻥 뚫린 하늘 아래서 숨 쉴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선사해 주었다. 리사는 이곳에 머무를 우리를 위해 신선한 꽃을 사두었다고 한다. 집안 곳곳에 그림들은 그녀가 취미로 그리거나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냥 이 집은 따뜻함 그 자체였고 머무르는 사람에 대한 그녀의 섬세한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숙박업을 운영하려면 그녀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곳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리사에게 너무 감사했다. 고향이 너무 그리웠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내 침대에 누워 책도 보고, 치킨도 배달시켜 먹고 친구들과 가족들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따뜻한 집에 와서 너무 감동을 받았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고단한 여행자가 나를 감싸 안아주는 듯 포근한 곳을 만나면 밖에 나가기 힘들어진다.
짐을 풀고 우리는 집 근처 마트에 들러 장을 봤는데 올리브, 살라미, 프로슈토, 각종 치즈, 와인 등 지역 특산품까진 아니어도 그 지역에서 생산된 로컬 식재료를 잔뜩 사 가지고 숙소에 돌아왔다. 토스카나 지방은 끼안티(Chianti)라는 와인의 원산지이다.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만 끼안티라는 와인은 잘 몰랐는데 이 지역에서 나는 유명한 와인이라고 해서 5유로짜리 두 병을 구입했다. 치즈 플레이트를 만들어 안주 한 상을 차리고 끼안티 와인 한 병을 딴 후 테라스로 가져가 휴대용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고 감상하면서 음식과 와인을 즐겼다. 그리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넣고 너무 놀랐다. 세상에……. 이 저렴한 와인에서 토양의 맛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가 무슨 와인 감정사도 아니고, 혀가 예민한 것도 아닌데 정말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돈을 아끼려고 만 원대 신대륙 와인인 칠레산이나 호주, 미국산 와인으로 대충 와인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며 살다가 이탈리아에 와서 끼안티 와인을 맛보니 이건 마치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네랄이 풍부한 토질에서 영양분을 쭉 흡수하고 뜨거운 태양에서 튼튼하게 과실을 맺은 건강한 포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영어로 ‘rich’ 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약간 오버하자면 바람의 맛까지 모든 것이 진하게 혀끝에서 느껴졌다. 큰일 났다. 입이 점점 고급스러워져서 더 이상 만 원대 칠레산 와인을 먹을 수가 없으면 비싼 와인을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 수 없는 한국에서 내 삶이 고달파질 텐데……. 잠시나마 와인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즐겨야 한다.
우리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피렌체를 9일 동안 딱 세 번만 가고 리사의 집에 콕 박혀 있었으니, 우리가 포지본시의 우리집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커다란 짐을 지고 이곳저곳 다니느라 너무 힘들고 피곤했는데 리사의 집은 달콤한 쉼터이자 위로 그 자체였다. 그렇게 우리는 토스카나의 포근한 우리 집(home)에서 지친 날개를 쉬다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