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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아빠 May 18. 2021

퍽퍽한 수육, 팍팍한 대화

남자 주부가 마음이 상할 때.

버블껌을 씹는 것처럼, 수육을 씹을수록 턱이 아팠다. 저녁 음식으로 내놓은 전지살 수육이 정말 형편없었다. 식사가 아니라, 턱관절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네모 얼굴을 만들어주는 수육. 고기가 질기고 빳빳해서 삼키기도 어렵고, 이 사이에도 자꾸 꼈다. 누구 이빨이 건강한가 알려주는 수육. 며칠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낸 수육 같았다. 푸대접받는 느낌을 주는 수육. 기분 나쁘려면 이 수육을 먹으면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날의 수육은 한 마디로 불쾌함.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고 앉은자리가, 맛없는 음식 덕분에 기분이 나빠졌다.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내랑 다툰 것도 아닌데, 맛없는 음식은 아내와 나를 낯선 관계로 만들었다. 아내의 표정은 좋지 않은 것 같고, 벌을 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직장에서 고생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내놓은 음식이 맛없을 때, 참으로 민망했다. 퍽퍽한 수육만큼이나 대화가 팍팍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집 안에 큰 변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심각했다. 수육 조리과정을 되짚어 봤다. 고기의 신선도도 좋았다. 양파, 통후추, 된장, 마늘, 파뿌리, 수육 맛을 좋게 할 부재료도 빠진 것 없었다. 불의 세기가 문제였을까? 아니다. 분명, 팔팔 끓을 때 중약 불로 줄여서 끓였다. 평소와 다른 건 두 가지가 있었다. 냄비에 뚜껑을 덮지 않고 끓였다는 것과 수육을 끓이는 시간이 2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30분 덜 끓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평소보다 조금 더 작은 냄비를 썼다. 아무래도 끓이는 시간이 짧았던 것 같다. 요리를 성찰할 줄이야...


정적을 깨고, 아내가 정말 조심스럽게, "오빠 오늘 수육이 맛없어..."


아내가 맛없다고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아내가 평소와 다르게 너무 맛이 없어서 충격을 받아서 하는 말이었다. 남편이 평소 같지 않을 때,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었다. 혹시나 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선생님에게 수업이 재미없어요. 가수에게 노래 못해요. 축구선수에게 왜 그렇게 축구를 못해요. 직장인에게 결재서류 이게 뭐야? 하는 것처럼, 음식이 맛없다는 말은 주부로서 실격이라는 말로 들렸다. 고무장갑을 벗어버리고 프라이팬을 내려놓고 싶어 졌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시간, 어떻게 요리할까 생각하는 시간, 요리하는 노력, 음식을 차리며 담은 마음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쩌겠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주부는 그만둘 수도 없는 걸.


다시 해가 뜬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앞치마를 한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올리고 기름을 두른다. 잠을 깨며 계란을 튀긴다. 아들이 맛있다고 따봉을 날려 주면 좋겠다. 아들에게 "맛있어?" 묻지 않고 맛있다고 말하라는 마음을 담아서, "맛있지!?" 하며 물어야지.


저 삐치지 않았어요. 하하.

여보, 당신은 나가서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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