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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Apr 19. 2021

아줌마 씨부럴은 욕이 아니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실천 편

몸이 여기저기 욱신하는 게 뭔가 몸살이 날 것 같은 정신이 몽롱한 금요일 밤이다. 일찍 잠을 청하려고 누웠는데 "카톡"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그래도 궁금증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여다본 나는 욱신하던 근육이 갑자기 마비되면서 쨍하고 머리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기가 막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테니스 레슨 단체 카톡방에서 일면식이 없는 한 무례남이 남긴 말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다.

Ivy와 영어 이름이 Grace인 나는 아침 주부반에서 테니스 레슨을 받다가 같이 치던 동료 한 명이 팔을 다치는 바람에 3주일 전부터 저녁반에 합류하게 되었다.  

무례남 1이 술 도매업을 하는지 저녁나절 와인과 맥주 리스트를 보내준다기에 카톡방에서 영어 이름이 Grace인 나와 IVY는 분명 공손하게 "부탁드립니다."라고 요청을 했다. 그런데 리스트 대신 올라온 말은

"테니스에 모르는 분들이 많아졌나 보네요. Grace나 Ivy 씨는 누군지. 아줌마들이 많이 조인했나요? ㅎㅎ"


뭬야!

나도 Ivy도 아줌마 맞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본 적도 없고 친분도 없는 우리에게 아줌마 어쩌고 하는건 예의가 아니지 싶었다. 더욱이 근래에 들어와선 아줌마라는 단어를 긍정적 의미보다는 억척스럽거나 나이 든 사람한테 비아냥 거리는 부정적 어감으로 쓰기에 '저 사람 뭐야'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게다가 뒤에 붙은 ㅎㅎ는 뭐지? 우릴 비웃는 건가?

카톡방에 감정 상함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불끈하기엔 아줌마로서의 품위가 손상될까 봐 참기로 했다.

그런데 뒤이어 무례남 2가 남긴 말은 더 가관이었다.

메시지를 날리고 3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삭제했지만 이미 숫자 몇 개가 삭감되어 있었다. 그 찰나를 스친 몇 명은 아마도 각기 다른 장소에서 얼어붙었을거다.

난 무례남 1이 아줌마라고 우리를 비아냥 거린 순간 어이상실에 이미 말갛게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라 무례남 2가 재빨리 삭제한 메시지를 삭제되기 전에 보고야 말았다.


"아줌마 씨부럴"


뭐야! 이 미친 소리는!!

오늘 둘이 날 잡았니?


무례남 2와 세 번의 레슨을 같이 받는 동안 그에 대한 인상은 나름 괜찮았다. 여자 친구와 늘 함께 레슨을 받으러 왔는데 배려심도 있고 예의도 바르고 젊음의 서툰 열정을 한 번도 내비친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럼 저 삭제한 말은 평소 내면에 담고 있던 무의식의 발로였던가!

진정 미치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

난 욱하는 마음에 그에게 냅따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좁은 쿠알라룸푸르 교민 사회 안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짓은 좀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아무리 급 삭제를 했지만 재빨랐던 내 눈은 이미 나와 아이비를 향한 욕을 보고 말았고 감정이 점점 격해지니 마치 무례남 2가 남긴 멘트가 대한민국 전체 아줌마들을 향한 가운데 손가락 날림쯤으로 확대 해석되기까지 이르렀다.


난 삭제되기 전의 메시지 옆에 줄어들었던 숫자 안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도록 교양을 지키되 네 말에 마음 상했다는 것을 내포하는 느낌을 실어서.

 

Grace-"쪼룡식님 제가 삭제하신 메시지를 이미 봐버렸네요"

쪼룡식-어... 엥? 그 뜻이 아닌데..... 죄송해요.. 오해하지 마세요... 담에 뵙겠슴당.


아~ 저 어이없는 시추에이션은 뭔가?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성의 있게 해야지.  어쩌다 그런 메시지를 남기게 되었는지 메시지 쓰다가 갑자기 뇌가 이상 경변을 일으켰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손가락에 마비가 와서 헛눌렀다든지 적어도 해명이란 걸 해줘야 오해를 풀든 말든 선택을 할 것이 아닌가. 한참을 씩씩대다 늦은 밤에 누굴 붙잡고 하소연을 할 수도 없고 욱신거리던 내 몸은 이제 버틸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 기절하듯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에 제정신이 들었는지 무례남1이 테니스 단체 카톡방에 멘트를 남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무례남 1이 최초로 아줌마라고 한 발언이 불씨가 되어 불난 집처럼 어수선하게 된 카톡방의 분위기를 늦게서야 눈치챘는지 새벽녘에 단체 카톡방에 사과문을 남겨 놓았다.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테니스 치던 분들만 있는 줄 알고 생각 없이 메시지를 남겼네요. 죄송합니다."


저건 또 무슨 아메바같은 발언인가!

분명 IvyGrace인 내가 공손하게 음주 리스트를 보내 주십사 하고 부탁하는 카톡을 보냈건만 그 카톡을 읽고 우리의 존재까지 알아놓고선 저런 생각 없는 사과를 하는 건 뭔지 도통 그의 뇌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사과는 더불어 바로 전날 밤 "아줌마 씨부럴"의 욕을 다시 상기시켜 더욱 화나게 했다.


그때부터 다른 일은 손에 안 잡혔다. 이 일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무례한 그들한테 통쾌한 복수를 하든 진정성 있는 사과나 해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우선 아이비가 저 삭제된 메시지를 읽었는지 궁금해서 연락을 했다.

아이비는 홍콩댁이다.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해서 한국말을 잘 하긴 하지만 좀 서투르다. 그녀가 무례남들의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정말 궁금했다.


"아이비, 어젯밤 메시지 봤어요?"

"네~ 언니. 저도 그렇잖아도 기분 나빠서 테니스 레슨 그만둘까 생각했어요."

"아.. 자기도 기분 나빴구나. 쪼룡식이 남겼다 삭제한 메시지도 봤어요?"

"그거 얼핏 본 거 같은데 제대로는 못 봤어요."

"아줌마 씨부럴이라고 했어요. 정말 기분 나빠서 나도 레슨 그만두고 싶은데 왜 우리가 그만둬요? 잘못한 그들이 그만둬야지."

"아...쪼룡식 그 사람 정말 실망이에요. 우리랑 같이 칠 때는 그런 내색 전혀 않더니 말이에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게 내면에 깔려있던 진심이었던 거지. 그게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가 실수다 싶어 얼른 삭제한 거 같아요."

 

통화하는 동안 아이비 주변이 어수선해서 이 사태를 지혜롭게 어떻게 해결할 건지 결론은 내지 못한 채 아쉽게 전화를 끊었다.

이젠 아이비의 생각도 내 생각과 동일하다는 걸 알았으니 내 기분 나쁨은 객관적이라는 게 입증되었다며 더 마음 놓고 기분 나빠했다.


불혹의 나잇 길로 접어들고는 예전보다 많은 것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절대 참지 말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고집도 생겼다. 이번처럼 무례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확고해졌다.

 젊은 시절에는 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헝클어지는 분위기가 싫어서 화를 꾹 누르며 억울한 마음을 한참 동안이나 품고 산 적도 많았다. 무례한 사람 앞에서 그저 울그락 불그락 얼굴을 붉히거나 억울이 솟구치면 뚝뚝 떨어뜨리는 눈물로 대처를 했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이제는 모른 척 지나가고 싶지 않아 졌다. 그들이 무례하다는 걸 이야기해주고 싶었고 내 기분이 당신의 무례로 인해 상처 받았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 졌다. 어떻게 그들에게 내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그들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낼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이 깜깜한 뇌 속의 우주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이런 아메바 같은 것들"

이렇게 남겼다가 잠시 후 삭제를 한 후

"진심이 저도 모르게 몸 밖으로 튀어나왔군요. 죄송합니다" 이럴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서 혼자 큭큭 웃었다. 그런데 이건 <그들과 같은 종족입니다>라고 표현하는 유치원생 같은 짓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엔 분이 안 풀렸다. 시간이 흐른다 해도 '그럴 수도 있지' 할 문제로 이해하고 넘어가 질 것 같지 않았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몇 년 전 인천공항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구입했던 책 제목이 떠올랐다. 분명 읽는 도중 수십 차례 고개를 끄덕였고 <어쩜 이렇게 젠틀하고 교양 있게 대처를 했을까>라고 감탄을 하며 읽었던 느낌은 나는데 막상 내가 이들을 상대하자니 현명한 대처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책의 일부를 발췌해서 내 마음이 이렇다는 걸 표현할까? 그럼 그들이 알아듣고 미안해하지 않을까? 책을 다시 펼쳐보며 적절한 문장을 찾았다. 여러 문장을 갖다 대보며 그 문장을 접했을 무례남들이 어떻게 무안해할지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들이 꼭 무안해하는 꼴을 봐야지 내 마음이 치유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인 쾌감은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가 왜 아메바 같은 짓을 했을까 후회할 것 같았다. 나중에 서로 얼굴 맞대고 테니스라는 걸 칠 수도 없겠지 싶었다.

더 큰 지혜가 필요했다. 마침내 책 속에서 발견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생각보다 해야 할 말은 단순했다.

"저희 이 카톡방에 아줌마 딱 둘 있는데 둘 다 상처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무안함보다 미안한 마음이 진심으로 생기길 바랬다.

곧바로 무례남 2인 쬬룡식한테 보이스톡으로 연락이 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저는 그 뜻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라 그분이 아줌마라는 표현을 쓰길래 그러면 안된다고 쓰려고 했는데 술김이라 손이 헛나갔습니다. 정말 욕하려던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그만 욕설처럼 쓰고 말았네요. 진짜 죄송합니다."

"그럼 어제 해명을 바로 하지 그러셨어요. 그럼 이런 오해도 없었을 텐데요."

"술을 많이 마셔서 제대로 해명을 못했어요. 그런데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믿어주세요."


손가락이 엇나갔다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무례남 1이 남긴 아줌마라는 표현에 불끈해서 그러면 안된다고 쓰려했다는 진심 어린 그의 해명이 마음에 와 닿았다. 아마 그는 이런 말을 하려다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싶다.


"아줌마라고? 씨부럴, 어디서 그런 표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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