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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 Jun 13. 2021

친화력 만렙을 위하여

내 생에 처음 만난 도둑에게 나눈건

#만렙의 사전적 의미#

한자 찰 만(满)과 영어 레벨(Level)의 합성어로 만레벨로 불렀고, 이 단어를 줄여서 만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게임 유저들에 의해 만들어진 용어다.



서정주 시인이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듯이 내가 스물세 살 되던 해 돌아가신 할머니는 나를 키운 팔 할의 몫을 차지한다. 지금은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었지만 버릇과 인격이 형성되는 대부분의 중요한 시기를 할머니와 보내서인지 여전히 내 몸에서 할머니의 유전자가 불쑥불쑥 튀어나옴을 느낀다.

한마디로 나의 자아 형성은 할머니의 역마살에서 비롯되어 수많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한 친화력으로 완성된 것 같다.

지금 할머니를 떠올려도 참 순수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계산이 들어가지 않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분이었다.

할머니에겐 오다가다 알게 되는 낯선 사람과도 서로 견제하는 마음을 허물게 하는 순함이 뿜어져 나왔다. 할머니는 평생을 만날 사람이 많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여기서 얻은 걸 저기에 퍼주고 하는 방식의 나눔을 실천한 분이었기에 세상 속에서 누구보다 조화롭게 잘 어울리다 가신 게 아닌가 싶다.

이런 할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에 세상을 좀 더 다양하고 쉽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죽을 때까지도 할머니의 손녀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기억 속에 할머니는 누구와 다투거나 누굴 미워하거나 하는 나쁜 감정을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다. 사돈의 팔촌까지 두루두루 친했고 심지어 내가 여덟 살 때 이사한 낯 선 동네의 할머니들과도 친해져서 종종 할머니를 따라 동네 할머니네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보다 더 수다스럽거나 특별한 유모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 사람들이 할머니만 보면 반가워하게 하는 마력 같은 걸 지니고 있었다.

이런 할머니의 영향 아래 자란 나 또한 그닥 싫은 사람도 미운 사람도 별로 없이 더불어 잘 지내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이런 친화력은 살면서 가장 위기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여 내가 가진 어떤 기질보다 가장 쓸 모가 있다는 걸 증명했다.

대학 때 잠깐 작은 아버지네서 더부살이를 했는데 작은 아버지의 삼층 건물 가운데 술빵을 제조했던 일층 건물을 난 운이 좋게도 찬바람이 부는 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독차지할 수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여고 동창생 K와 함께였다.

스무 살이 며칠 안 남은 12월 말 그날 하루 종일 집안에서 뒹굴거렸던지라 특별했던 날이 됐음에도 밤이 오기 전의 기억은 전혀 없다.

잠들기 전에 난 잡지책을 뒤적였고 친구는 옆에서 화투점을 보았는데 "밤에 손님이 온다"라는 점괘가 나왔다는 K의 말에 "눈님이 오시려나 보네."라며 마주 보고 웃었던 기억만 생생한 날이었다.

새벽 두 시쯤이었나. 막 깊은 잠에 빠져 어둠의 적막함 속에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던 그 시각쯤에--------

두터운 손바닥이 내 입을 덮어 답답한 느낌에 눈을 뜬 나는 작은 아버지가 서프라이즈로 장난을 치나 했었다. 하지만 그건 잠에서 덜 깨었을 때의 착각이었고 내 입을 덮은 손은 낯선 사나이 즉, 도둑이었다.

난 그 순간 왜 속담이 떠올랐을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는 말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절대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도둑이야!"를 외치면 분명 도둑은 우리보다 더 당황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가 짧은 찰나의 순간 내려진 결론이었다. 도둑 또한 사람이니 내가 인간적으로 먼저 다가가면 나쁜 짓을 하지 않겠지 라는 순진한 기대감도 있었던 듯하다.

"누구세요?"라는 말로 시작해 어떻게 이 집에 들어오게 됐는지 도둑에게 말을 걸었다.

최대한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최대한 도둑을 존중하는 어휘를 선별하고, 최대한 인간다움으로 접근했다.

도둑은 방 옆에 붙어있던 주방의 미처 잠그지 못한 작은 창문을 떼어내고 그 틈 사이로 힘겹게 들어왔다고 했다. 차마 그를 똑바로 보는 대담함까지는 부족해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가 창문을 떼고 들어오기에는 그의 실루엣이 좀 벅차 보였다.

아무래도 그 도둑은 초범이었던 듯싶다. 우리가 물어보는 말에 조곤조곤 대답도 잘해주었다. 고향이 어딘지, 왜 타지에 나와 살게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는 일용직 근무자로 일 때문에 홀로 외지에 나와 자취 중인데 밤늦게 돌아왔더니 열쇠를 잃어버린 걸 알게 되어 주위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우리 집에 도둑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거란다.

하루 종일 굶었는지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주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 또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라 도둑에게 선뜻 숨겨놓은 내 생활비를 내줄 처지는 못되었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도둑은 가난한 고학생의 살림 털기를 포기하고 동이 터오기 직전까지 우리와 이야기를 하다가 너네들은 똑똑해서 시집 잘 가겠다."라는 축복? 의 말을 남기고는 도로 떼고 들어온 창문으로 나가려는 걸 앞문을 열어줄 테니 거기로 나가라는 내 제의에 고마워하며 조심스레 돌아갔다.

물론 그 이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처럼 한동안 바람 소리만 들어도 잠에서 깨어 깜짝깜짝 놀랐다. 하지만 도둑맞았던 순간을 가장 무섭고 끔찍한 날로 기억되지 않음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도둑에게 위협을 받았음에도 친근함으로 다가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건 살면서 두고두고 교훈처럼 남았다. 상대방은 다 나하기 나름이라는.



이후 나의 이런 친화력은 해외 생활자로 살면서 빛을 발했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걸 큰 낙으로 삼았던 내가 중국에 도착하고 나서부터는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반벙어리처럼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그 상황을 수긍하고 받아들여 얌전하게 그저 그런대로 살아갈 나는 절대 아니었다. 전투적인 성향이 강한 난 미리 사전 준비라는 걸 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다. 그냥 그것에 닥쳐야지 몰입하는 성향이 강하다. 중국에 도착하기 전 내가 익힌 단어는 "니하우"가 다였다.


중국에 도착하고 말이 안 통하는데 사람들이랑 소통은 해야겠고 그저 물건이나 사고 흥정을 하는 방식의 삶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돌도 채 안 된 딸아이를 데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되지도 않는 말로 때로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한국어와 바디랭귀지, 영어를 섞어 써가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어차피 중국인들의 말은 뭐라고 하는지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도 들리지 않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해야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그 당시 내 중국어 실력은 회화책에서 한 문장씩 겨우 외워 그걸 써먹는 방식이었으니 제대로 된 대화가 오고 갔을 리는 없다. 중국인들은 내가 한 문장을 성조와 문법도 안 맞게 떠듬떠듬 겨우 말하면 중국어를 엄청 잘하는 줄 알고 속사포처럼 수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확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집 근처의 사람들과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A를 말하면 그들은 B라 대답하고 난 전혀 상관없는 C로 알아듣는 제대로 된 공감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친밀감을 갖고 친해지기 시작하니 중국에 도착하고 처음 느꼈던 낯설고 지저분한 환경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날마다 여행을 즐기고 있는 듯한 신기하고 새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주변의 중국인들과 감정으로 친해지니 중국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중국이란 나라가 제2 고향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중국인들과 친해지면서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단순히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중국 친구들은 황송한 친절을 베풀었고 그들에게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으며 외국 생활의 불편함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 점차 내 언어가 자유로워지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나도 위로가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 도움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협력 관계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중국어만 잘하려 하고 그들과 섞이지 않으려 했다면 오늘날 중국에서 경제생활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못했을 것이다. 언어가 안되었지만 처음부터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려 했던 친화력이 좋은 친구들을 얻게 해 주었고 어려운 중국어를 더 빨리 습득할 수 있게 해 줬다.


살면서 사람에 대한 친근한 마음은 어느 나라에서 어느 낯선 이국인을 만나도 다 통한다는 이념이 생겼다.

친화력이야말로 세상 사는데 어떠한 힘이나 지식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오죽하면 중국에서 가장 큰 힘은 꽌시(인간관계)라고 하는가.

사람 마음이 모두 내 맘 같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진심은 반드시 통하게 되어 있다"는 말은 여전히 인생의 진리로 다가온다.

중국인들 속에서 그들과 진한 공감대를 형성하기까지는 다양한 노력과 시도가 필요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거저 얻어지는 건 없다. 언어도 언어지만 내가 그들과 친해지고 싶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때로는 한국 음식으로, 때로는 내가 가진 재능 봉사로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에게 먼저 마음을 열었다. 이제 중국인을 친구로 만드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나의 숙제다.

할머니의 친화력 만렙이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만 그친 건 해외 여행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 탓이라 쳐도 지구촌 시대에 사는 나는 오십이 되기 전에 친화력 만렙의 밑바탕을 만들기 위해 어학연수를 떠나는 게 꿈이다. 그럴 일이 없어야겠지만 위기의 순간에 또다시 친화력을 발휘하려면 I can't speak English very well만으로는 안 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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