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당연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늘 내 몸만 조금 움직이면 길들여져 있던 것과 금세 마주 앉을 수 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던 때였다.
내 삶과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여서인지 늘 내 옆에 있는 게 당연했고 존재함 자체에 고마워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소중하다는 말도 세상에 좋은 말이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정 표현을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너무 별거 아니라서 말하지 않는 것
너무나 소중해서 말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에 말을 붙이고 싶다.
<나도 모르게 생각한 생각들> 요시타케 신스케
이젠 이런 소중한 것들이 내 곁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은......
즉 길들여져서 소중해지는 관계란 그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마음이 오고 가야 관계가 깊어지고 내 마음에 들어앉게 되지 마음이 오고 갈 수 없는 것들이 어찌 길들여짐의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동물과는 마음을 나눌 수 없으니 당연히 길들여질 수 없다고. 나는 어린 왕자처럼 순수해지기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어른이라고 동물을 사랑할 수 없음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관계란 소중할 수가 없다.
"엄마, 엄마는 어렸을 때 고양이 안 키워봤어?"
어느 날 작은 아이가 물었다.
"고양이? 아니 고양이를 왜 키워? 엄마가 어렸을 땐 고양이를 집안에 두고 키우는 사람은 없었어. 그냥 고양이는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알아서 크는 거지."
어린 시절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지금 거주하는 아파트 형태가 아닌 툇마루와 마당, 방이 모두 분리되었던 전통 가옥 형태에서 살았다. 고양이의 활발한 습성상 집안에 두고 키울 수도 없었거니와 우리 동네 어떤 집도 고양이를 집안에 두고 기르는 집은 없었던 것 같다. 고양이는 쥐를 잡기 위한 동물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우린 주로 고양이를 도둑고양이와 들고양이 정도로 나눠서 불렀다. 누구네 개처럼 누구네 고양이 이런 호칭은 특별히 없었던 것 같다. 아주 가끔 어른들이 고양이를 "나비야~"라고 부르는 건 본 적이 있다. 나비야~가 고양이의 최고 애칭이었던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한 번도 고양이가 예뻐 보였던 적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당연히 한 번도 고양이를 집 안에 들여 키운다는 생각은 해보질 않았다. 시골에서 무수한 동물과 곤충을 접하고 살았지만 이건 당연히 내 집 밖에서의 근접함일 뿐이다. 사람 외에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 어슬렁거리며 내가 살고 있는 한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동물은 동물의 왕국에서 나는 내 집에서 각자도생 하는 자연의 섭리가 늘 최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삶은 늘 예측하지 않은 곳에서 변수가 일어난다. 내 뱃속으로 난 두 아이들은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고 특히 큰 아이는 사람보다 동물에 더 애착을 보이는 동물 애호가이다.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부터 동물에 겁을 내지 않았고 심지어 뱀마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 딸아이 때문에 우리에 넣고 키울 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애완동물을 키워왔다.
정말이지 이건 모성애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나의 인내력의 끝은 어디인가를 테스트하는 삶이 되어왔다.
그나마 지금까지 참고 키울 수 있었던 건 그동안 동거했던 것들이 모두 그들만의 집을 따로 갖고 우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전제 하라서 가능했다.
그런데 어쩌다 얼렁뚱땅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하게 되었고 집 안에서 어슬렁 거리며 내 공간을 불시에 침입하는 걸 허락해야 하는 냥이의 집사가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난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식탁에 앉아서 글이라도 쓸려 치면 어느 순간 뭔가 내 다리로 쓱 문대고 지나간다. "엄마야~!" 난 소스라치게 놀라고 고양이 또한 털을 바싹 세우고 꼬리를 치켜들고는 긴장을 한다. 집안에서 홈트라도 하려고 요가매트를 깔면 그 위에 납작 엎드려 누워 내 운동을 방해한다. 보라색인 요가매트의 색상에 반한 건지, 아니면 질감에 반한 건지 요가매트만 깔았다 하면 다른 곳에 있다가도 쏜살같이 달려와 매트 위에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 고양이를 무시하며 운동을 하면 내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는지 어느 순간 나한테 확 달려든다. 여전히 고양이가 무서운 나는 매트를 깔 때마다 고양이가 어딨는지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고양이도 눈치가 빤해서 자신을 경계하는 나를 보면 늘 긴장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집안에서 살지만 서로 불편한 존재로 냉전 상태를 이어갔다.
요가매트에 벌렁 누워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냥이
사실 고양이를 입양하고 집에 데려온 한동안 고양이에 대한 내 의도는 매우 불순했다.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동물 집사들이라 세상에 할 일이 없어 동물 집사 노릇이나 하고 있나 생각할 정도였다. 때로 고양이 집사나 개 집사인 지인 집에 놀러 가게 되면 자식보다 애완동물을 더 사랑하는 듯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때때로 동물 자랑을 자식 자랑보다 더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평범한 내 뇌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갔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다 이해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리인 걸 알기에 난 나대로 <그저 동물은 나와 다른 공간에서 사는 거다>라는 신념을 지키고 살아야지 했었다.
그래서 너무나 간절히 고양이를 바라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도 내 마음속에선 잠시 키우다 사라질 존재로 받아들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해성사를 하건대 솔직히 고양이가 가출을 하거나 우리 집 뻥 뚫린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려주길 은근히 바랬었다. 아마 고양이 집사들이 이 글을 보면 자식 키우는 엄마가 저리도 나쁜 생각을 하냐라고 비난을 하겠지만 처음 고양이를 입양하여 경계하던 시점엔 정말이지 불순한 의도가 불쑥불쑥 솟아 나왔다.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 못했듯이 냥이 집사들에게 또한 불순한 내 마음을 이해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집 냥이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똑똑하다. 베란다 사방의 구멍이 숭숭 뚫린 쇠창살로 되어 있음에도 바깥세상이 궁금할 때는 그 창살 옆에 서서 한참이나 바깥 구경을 한다. 어쩔 땐 뚫린 창살 사이로 목을 길게 빼고 더 자세히 관찰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절대 헛발을 내딛거나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경계선을 절대 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쓰레기통을 버리러 가면서 주방 문을 열어놓고 현관 밖으로 나가면 주방 밖으로 나와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절대 숭숭 뚫려있는 현관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훤히 뚫려있는 문 밖으로 뛰쳐나갈 법도 하건만 한 번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않는다. 자신이 머물 곳은 현관문 안쪽까지인 것을 아는 것만 같다.
절대 선을 넘지 않는 영리한 홍베리
생전 고양이란 족속한테는 정을 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저 아이들이 곁에 있을 때 키우다가 만약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다른 집으로 입양을 보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고양이는 어디로 가건 가족과 함께여야 한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고양이에게 순간순간 말을 건네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잘 잤어? 밤새 외로웠지? 가서 형아 좀 일어나라고 해."
마치 고양이가 우리 집 막내라도 되는냥 안쓰럽기도 하다가 사랑스러운 마음마저 든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이런 내 마음을 이젠 냥이도 알아챈 거 같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요가 매트를 깔고 운동을 해도 달려들지 않았다. 이제 우린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심지어 밖에 나가서 냥이 자랑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세상에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것에 길들여지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절대 내겐 소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고 문득 그것에 말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사람의 절대적인 가치관이 변하기도 하는구나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