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서 행복했던 날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엄마, 내 생일에 슈가슈가론 요술봉 사줘. 그럼 생일 파티 안 해줘도 돼."
11월 9일 다음 달 생일을 앞두고 아들이 딜을 한다. 아들은 세 살 때부터 요술봉 덕후였다. 세상의 온갖 요술봉은 다 모으고 싶어 했고, 내가 이십 대 때 유행했던 만화 '세일러문'은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때 완구로 만들어져 나온 적이 있었던 요술봉을 무척 갖고 싶어 하다가 20만 원이나 주고 구매를 하기도 했다.
"슈가슈가론은 얼만데?"
"60만 원이래. 40만 원에서 20만 원이나 더 올랐어. 원래 그게 처음 나왔을 때는 인터넷에서 2천 원이었대. "
60이란 숫자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깟 플라스틱 요술봉 하나를 60만 원이나 주고 사다니 아무리 고전 완구 모으는 어른이들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중고 장난감 하나가 경매 붙이듯 금액이 쑥쑥 올라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 물가에 대한 감각이 둔하다고는 하나 이제 열네 살 밖에 안된 아이가 60만 원을 무슨 과자값 말하듯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긴 아이들 눈에는 명품 가방 하나를 몇 백에서 천 단위까지 주고 구매하는 어른들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어릴 때부터 돈 알기를 우습게 아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은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서 저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겨버리기엔 참 안쓰럽고도 슬프다. 요즘 아이들의 정서에서는 왠지 풍요 속의 빈곤이 느껴진다.
벌써 강산이 서너 번 바뀌었을 세월들을 지나왔지만 라떼~라고 치부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다. 요즘 아이들 놀이 문화를 살펴보고 나 어린 시절 지나왔던 추억들을 되돌아보면 '지금은 참 좋은 세상이구나'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땐 물질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했지만 정서적인 풍요는 다시는 못 누릴 귀한 것들이었으니까.
아주 어릴 때 인형이라고는 집 뒷산에 심어놓은 옥수수를 따서 노는 게 전부였다. 마론 인형은 텔레비전을 통해 본 게 전부였고 산타를 믿었던 어린 시절 몇 년간의 소원은 크리스마스에 산타할아버지한테 마론 인형 하나 받는 거였다. 하지만 아랫집 집 선영 언니네도 그 밑에 집 성희 언니네도 아무도 마론 인형을 갖고 있는 집이 없어서 마론 인형은 텔레비전에서만 볼 수 있는 거구나 싶었고 그저 옥수수 하나씩 들고 옥수수수염을 머리카락이라 생각하고 참 정성스럽게 묶어주고 따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의 일상은 맨날 노는 거였다. 동네에 유치원조차 없는 시골 마을이라 들로 산으로 개울가로 엄청 쏘다니며 놀기만 했다.
흙에서 노는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아이들 움직임에 따라 흙 모양이 계속 바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생각은 손끝에 나타납니다. 흙으로 이것저것 만들다 보면 흙에 흠뻑 빠져듭니다. 흙은 아이들의 지난 시간을 간직합니다. 아이들은 흙을 파고 뚫고 쌓고 막고 날리며 맘껏 놉니다. 흙은 아이들의 하고 싶음을 다 들어줍니다.
<자연에서 노는 아이> 고무신. 구지원 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저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감정들이 솟아오른다. 때론 울컥 치밀어오르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병에 눈물이 눈자위까지 흔적을 보이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내 세대까지가 끝이었구나 싶으니 아이들이 참 가엾다.
우리 아이들 입장에선 어린 시절 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 엄마는 너무나 가난해서 인형 하나 가져보지 못하고 불쌍하게 컸구나 싶겠지만 그때의 결핍은 살면서 우리 아이들은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수시로 가져다주었다.
난 가난한 집안에 첫째 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시골 말단 공무원 임시직이었고 쌀이 떨어질까 봐 무서워 때때로 국수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엄마가 설날 남은 떡국떡을 잘 말려놓았다가 라면에 넣어 끓여주거나 국수와 라면과 섞어 끓여주면 맛있는 라면부터 먼저 건져 먹었던 생각이 난다. 그땐 온전한 라면 한 그릇으로도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시절 우리의 놀잇감은 자연이 전부였다. 땅바닥 여기저기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던 병뚜껑을 찾아내고 깨진 사기그릇 조각을 찾아내어 소꿉놀이 살림을 차렸다. 손만 뻗으면 들판 지천에 소꿉놀이에 쓰일 음식들은 널려 있었다. 계란꽃을 꺾어 병뚜껑에 얹어놓고 강아지풀을 뜯어내어 사기그릇 조각에 담아놓으면 그럴싸한 한상이 차려진다. 이 놀이가 실증날 틈도 없이 우린 들판의 개구리 잡기에 열을 올린다. 조그맣고 새파란 청개구리를 손바닥에 오므리고 잡고 있다가 간질간질 못 견디겠으면 얼른 풀어주었다. 청개구리를 잡으면 비가 온다고 했고 비가 오면 나가 놀지 못하니 잠시 잠깐 개구리 온기를 느끼기만 했다.
어쩌다 쨍하고 말갛던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다 그치는 여우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호랑이가 장가를 간다고 설레발을 쳤다. 그 위로 무지개가 둥그렇게 뜨면 행운이 온다고 좋아했다.
책을 한 번도 안 읽어본 우리였지만 어디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는 많았다.
초봄이 되면 각자 호미 하나씩 들고 나와 냉이를 캐기도 하고 쑥을 뜯어 엄마한테 한 소쿠리 안겨주던 기억도 난다. 지금도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향긋한 냉이 된장국과 쑥개떡은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음식이다.
집 앞 예당 저수지 옆으로 자그마한 개울이 있었는데 새우를 잡고 조개를 줍던 조막만한 손길은 나이답지 않게 야무졌다. 때론 저수지로 낚시하러 오는 어른들을 골탕 먹인다고 지나가는 길목에 풀과 풀을 묶어놓고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낚시꾼들의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말괄량이 짓도 했다.
마론 인형 하나 내 것으로 가져보지 못했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자연과 더불어 어우러졌던 추억들은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어쩌면 살면서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던 순간에도 잘 견뎌내고 살아냈던 건 어릴 적 대자연을 벗 삼아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난 덕분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안고 사는 세대가 내가 마지막이 될까 봐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