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일을 선택했다. 긴 장정이 펼쳐지고 있다. 1월부터 시작한 글쓰기와 전시모임은 어느덧 5월에 접어들었다. 작년, 책을 한 권 이상 출간했던 저자들끼리의 4개월 글쓰기와 합평이 참 고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한창 도슨트로 바쁜 시기였고 밤 9시부터 시작해 자정을 넘긴 합평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의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초저녁부터 힘을 못 쓰는 내 생활 방식으로 봤을 때 할 수 없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때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했는지 깨닫게 된다. 누구 하나 한가한 이가 없었다. 모두 자기 일이 있었고 밤엔 글을 쓰거나 합평했다. 특히, 공저로 글쓰기를 이끌어 주었던 JW작가의 경우 누구보다 바쁜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일을 마치고는 돌아오는 길에 한 편의 글을 어김없이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씻기고 밤 9시가 되면 3시간이 넘는 글쓰기 합평을 진행했다. 젊어서 그런 걸 거야. 불사조인가? 대단한 에너지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
수요일은 강의 의뢰가 와도 진행을 할 수 없다. 가끔은 차근차근 준비한 대로 혼자서 가도 충분할 텐데. 계약한 책 부지런히 써서 출간하면 더 빠르게 갈 수 있을 텐데.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고 작가로 글만 쓰면서 살 수 없는 현실을 느끼기도 한다. 올해는 미술관에 작품 보러 많이 다녀야지 하고 마음먹었었다. 그마저도 한 달에 한 번 시간이 날 뿐이다. 드라마 ‘인간 실격’에서 부정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되뇌던 말.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내내 그것을 깨닫는 중이라던 부정의 독백이 내 심장에 새겨져 버렸다. 독불장군 같은 마음이 피어오를 때마다 사는 의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곤 세상에서 한걸음 떨어져 나와 나를 바라본다.
한때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전우익 농사꾼? (작가가 말하길)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란 책을 옆에 두고 읽었다. 장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읽을 때처럼 번잡스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순한 맛에 물들어가는 시간이 좋았던 때다. 내가 고른 책들이 나의 성향을 반영하고 그 내용처럼 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짙어지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에 따라 상대방의 마음이 투명하게 읽히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순한 맛을 지향한다. 그런 순한 맛의 사람들이 모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인다. (어쩌면 내 코가 가장 석 자인지도 모르겠지만) ‘갯마을 차차차’의 홍반장 같은 사람으로 살면 어떨까 싶다.
생각의 우물을 계속 퍼 올리기
하루에도 수십만 가지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 안에 있는 양심의 잣대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는 때도 있고 어떤 생각들은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기도 한다. 직성이란 단어의 어감이 별로 좋지 않아 찾아보니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그 사람의 고유한 성질이나 기미라고 한다. 타고난 것까진 바꿀 재간이 없는 모양이다. 내 머릿속은 우물과도 같아서 끝없이 길어 올려야 마르질 않는다.
지중해성 기후에 맞게 부는 바람 속에서 그림을 보고 글 쓰는 ‘살롱 드 까뮤’ 멤버 모두 자신이 뜻하는 바대로 책과 글 속에서, 그림과 글쓰기 속에서 훨훨 날개 달고 저 높은 곳까지 날 수 있기를. 어느 시절 우리가 함께했다는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되기를. 피곤한 몸 이끌고 들어와 읽은 수백 개의 카톡 내용 떠올리며 ‘피식’ 웃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그런 날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도 글쓰기에 정성을 쏟는다. 삶이란 그 무엇인가에 정성을 쏟는 일이다. 내 앞에 주어진 시간에 정성을 들이고 만나는 인연을 통해 시절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일로 삶이 꽤 흥미롭고재미있어졌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