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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Jun 05. 2024

이은새/눈 비비는 사람 2017

눈이 벌겋던 순간들

이은새/눈 비비는 사람 2017


에피소드 1.

“작업은?” 옆 강의실에서 부스스하게 나오던 동기의 말이었다. “끝나기는 할까?” 내가 뱉은 말이었다. 일이 ‘데드 라인’이었다. 여러 개의 강의실은 이름표가 붙여진 각자의 작업실 같았다. 실험 영상을 촬영하던 ‘어퍼(UPPER)’ 팀의 작업실(강의실)은 ‘프로디지(The Prodigy)’의 '스맥 마이 비치 업(Smack My Bitch Up)'이 작업실 밖으로 흘러넘쳤다. 앨범 표지에 찍힌 게처럼 수만 마리의 게가 옆으로 옆으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게가 아니라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집단 게의 형태였다.     


그 시절의 누구도 맑고 깨끗한 얼굴이거나 정상적인 복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무언가를 오리고 자르고 붙이느라 청바지의 무릎은 한결같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카디건을 걸치기보다는 단추도 어긋나게 채워진 체크 남방 정도가 동기들의 일상 차림이었다.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시간에 만화 구공탄의 눈을 하고선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며 몇 마디 건네는 게 전부였다. 1층엔 사발면 자판기가 두 대 있었다. 동기와 나는 육개장 사발면의 뜨거운 물이 면을 불리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사발면의 면발이 붉게 물드는 동안 벌게진 우리들의 눈은 조금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에피소드 2.

전날 9시쯤부터 가진통이 시작됐다. 병원에선 다음 날 아침에 오라고 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배, 작은 골반 안에 갇힌 커다란 아이는 왼쪽 골반을 저리게 해 종종 무언가를 붙잡고 서게 했다. 생리통처럼 시작된 가진통은 크게 아프지 않으면서도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다음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날 오후 6시 47분. “어머님 눈 떠 보세요.” 거구의 간호사가 건네던 말이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는 3.66킬로그램의 사내아이는 울고 있었지만 순한 기운이 느껴졌다. 라마즈 호흡법으로 자연분만을 권장하던 병원이라 막바지에 간청한 ‘제왕절개’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뚫어뻥 같은 흡입기로 아이의 머리를 뽑아내고 거구의 간호사가 배 위에서 아이를 짜냈다.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채 아이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거울 속의 여자는 링 위에서 마지막 경기를 마친 권투선수 같았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눈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눈 안에 카민 색의 얇은 실을 얼키설키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두 시간 만에 출산을 마치고 씩씩하게 인증샷을 보내던 친구는 아이를 작게 나아서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출산 때 영상은 그 이후로 한 번도 재생하지 않았다. 여자의 눈은 여전히 벌건 채일 것이므로.     


에피소드 3.

“우리가 만난 것은 인연일 거야.” 고양이 입양 카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쯤부터였다. 어린 시절 고양이를 키워 그런 환경이 친숙한 남편과 사랑이 많은 아이가 고양이 입양을 원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아이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입양에 관해 준비했다. 주말이면 빠짐없이 ‘동물농장’을 보던 가족이라 ‘샵’에서 데려오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물론 샵에도 여러 번 가고 고양이 카페에도 많이 다녀봤다)     


유림이는 전주에서 데려왔다. 금방 크면 안 된다고 하루에 정해진 소량의 사료만 먹던 아이였다. 예쁜 인형처럼 키워지던 유림이는 주변을 여전히 경계하고 유찬이가 곁에 오는 것을 싫어한다. 몇 달 뒤 유찬이를 데려왔다. 이번엔 천안이었고 유림이와는 다르게 사랑을 듬뿍 받은 게 퉁퉁한 몸으로 느껴지던 아이였다. 주인과의 교감이 아주 좋은 아이였고 고양이 보다는 강아지에 가까운 성향을 가져 애교 부리는 때가 많았다. 대신 건식 사료를 제대로 씹질 못하다 보니 소화되지 않은 사료 알갱이를 그대로 게워내곤 했다. 우리 집에 올 때만 해도 엄청 비만 고양이였다.      


고양이를 데려오기 전에 알레르기 테스트하기 위해 피를 뽑았다. 아이와 나 둘 다 고양이 털엔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코가 막히고 눈이 간지럽고 고양이와 부비부비하고 난 후에 피부가 벌겋게 일어난 건 1년 정도 함께 한 후의 일이었다. 올 초부턴 기침도 끊이질 않고 콧물도 계속 나고 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데려올 때처럼 충분히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아있는 것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사랑 주고자 데려온 데엔 책임이 따른다. 키우기 전엔 알 수 없던 감정들을 선물로 받아 특별 조치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있을 땐 가려워서 벌게진 눈이고 없어지면 보고 싶어 벌건 눈을 하고 살겠구나. 이 아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길래.


#이은새 #현대미술 #살롱드까뮤 #미술에세이 #김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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