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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Jun 18. 2024

<김환기>_항아리, 1958

그가 ‘항아리’를 사랑한 일처럼

김환기/ 항아리, 1958


그 시간을 견디는 일

“내가 김환기 강의만 네다섯 번 들었는데 이렇게 강의 잘하는 강사는 처음 봐요. 강사의 소질을 타고났네요. 강의가 다방면으로 알차서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앞으로 남은 강의도 잘 부탁해요.”     


지난달 나를 짓누르던 걱정거리는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가 되었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인데 지나간 시간은 한순간처럼 느껴진다. 결국엔 시간이 해결해 준다. 도슨트를 시작한 일은 일곱 살 아이의 영향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머리가 하얀 도슨트를 보며 나의 노년도 그리되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십 년 전의 일이다. 나는 도슨트를 시작으로 강사가 되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걸 직업으로 갖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노트에 끼적이길 좋아하던 아이였기에 그저 뭐가 되든 예술가 언저리에 있겠거니 했다.

     

도슨트로의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신 그 경력 안엔 자원봉사자로의 도슨트도 있지만 문화 예술 강사로의 도슨트 (돈을 받고 일하는) 도 포함되어 이력으로는 나쁘지 않게 되었다.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내가 있는 곳에서 의식적으로 여러 걸음 뒤로 나와 나를 바라본다. 느리게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억울함을 인내하기란 쉽지 않다. 흥분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조금 미루고, 지루하고 자극이 없는 상태를 견디다 보면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게 인내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리라. 힘든 시간 동안에도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누가 뭐라든 성실히 내 일에 임하면 언젠가는 결과로 입증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말 중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우선은 그 시간을 견딘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겠거니 한다. 이런 삶의 태도는 아마도 엄마 쪽을 닮은 듯싶다. 불같은 아빠의 성격대로라면 참지 않고 바로 답을 했을 테니까.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향, 어떤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느리게 사고하는 나로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항아리가 나를 살린다.

요새는 김환기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항아리’가 나를 살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강의만 1년 사이 햇수로 여섯 번째다. 한 번도 같은 내용을 가지고 강의를 한 적이 없다. 이야기하는 내가 즐겁고 신이 나려면 지난번보다 조금 더 새롭고 참신한 내용들이 있어야 흥이 난다. 그렇기에 여섯 번의 강의는 모두 조금씩 다른 것들이 추가되거나 빠졌다. 이건 내 강의를 들을 청중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위한 일이다. 강의가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 헤맬 것이 분명하니까. 강의는 내게 마치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 같다. 이렇게 저렇게 구슬을 꿰어서 나만의 알록달록한 팔찌를 가지고 나가면 이런 팔찌는 어디서 샀냐며 궁금해하는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것에 나는 별 관심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내가 가진 생각과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이 큰 편이다. 아마도 김환기가 ‘항아리’에 가지는 관심이나 애정이 나의 그것과 비슷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남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대화가 된다고 생각할 테고, 또 누군가는 그들과 같은 것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후자 쪽이 나와 맞는 것인지 살아남고자 선택한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부터 나를 떠올려 보면 남이 가진 것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것을 어제와 다르게 만들어 노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내 강의를 듣거나 내 수업을 듣는 아이들에게 예술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을 통해 김환기가 왜 그토록 ‘항아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고 나도 그처럼 내가 가진 작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자체를 격려하고 위로하자는 내용으로 전달한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 속에서 지금의 나를 발견하고 어제 보다 새로워진 시각으로 예술을 접하게 되었을 때 변화되는 그 접점을 느껴보라고 한다.      


할 수 있는 영역의 스펙트럼

요새는 더 나아가 나만의 방법으로 전시기획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연대기 순으로 작품을 배열하는 일 말고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낄만한 작품들을 좋은 문장들과 함께 그에 맞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공간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 작품을 통해 가장 먼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작품을 만든 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란 거짓 아닐까. 일단 무슨 일이든 시작해서 꾸준히 한다면 할 수 있는 영역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볼 수 있는 시각도 다채로워지리라.      


근원 김용준은 김환기가 걸어오면 항아리가 걸어오는 것 같다고 했다. 김환기 또한 친구들을 만날 때면 자기 집의 어떻게 생긴 항아리를 만나는 것 같다고. 좋아하는 게 있다면 그쯤 되어야 진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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