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푸름 Apr 15. 2024

[독후감] 당신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것은?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을 읽고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 리쉬안 저 / 더라인북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중에 삼국지 외에는 중국 작가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릴 때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에서도 중국 작가는 찾아볼 수 없었고 지금도 언론을 통해 비춰지는 중국의 문화공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중국 콘텐츠를 보는 것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달에 읽게 된 중국 작가의 책은 다른 도서와 차별된 색다른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은 제7회 루쉰문학상을 수상한 중국 작가 리쥐안이 쓴 에세이로, 작가가 고비 사막에서 해바라기 밭을 가꾸며 살았던 시기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회색빛 돌덩이들이 높이 솟은 도시를 떠나 광활한 대지에서 토끼와 닭, 오리 등을 키우며 살아가는 자연친화적인 삶은 현대인들이 꿈꾸는 느긋한 전원생활 같지만 실상은 그런 이상과 크게 다르다. 나타나기만 하면 밭을 짓밟아 버리는 가젤 떼로부터 해바라기 밭을 지키고 시기에 맞춰 밭에 물을 대느라 고군분투한다. 그래서인지 노란빛이 가득해서 내용까지도 따뜻할 것 같은 책표지와는 상반되게 에피소드 곳곳에 아슬아슬함도 느껴진다. 에세이에 담긴 작가의 삶 대부분은 나와는 다른 점이 많았지만 마지막 주제였던 <인간 세상>에서 내가 경험한 여러 모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던 원주라는 도시는 작은 규모였지만 학교 학부모 모임 내 교육열과 자기 자식 자랑만큼은 서울 대치동만큼이나 뜨거웠다. 시험 때마다 누가 반에서 1등인지, 전교에서 1등인지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학부모 모임에서의 초미의 관심사이자 화젯거리였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반에서 1등 한 자녀의 학부모가 모임의 중심이 되었다. 말하긴 쑥스럽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는 반에서 계속 1~2등을 해왔다. 그래서 어머니는 모임에 나가시면 많은 어머님들에게 둘러싸여 학습 방법이나 진로에 대한 질문 공세를 받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말이 많아지면 꼬투리 잡힐 것이 많아지기 마련이라는 어머니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의 경험에 의거하여 더욱 확고해졌다. 그래서 어머니는 학부모 모임보단 학교와는 관계없는 동네에 계신 소수 지인들하고만 만남을 가졌다.


  종종 학교를 갔다 오면 주방 식탁에 다른 아파트 호수에 사는 친구 어머님이나 위층 아주머니가 계시곤 했다. 어머니께서 만나시는 분은 정말 적었지만 함께 이야기 나누는 분들이 원주 마당발이라서 그런지 많은 모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알아가기에는 충분했다. 조용한 어머니가 언제 저런 분을 만나셨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본 적은 없었다. 저렇게 활발하고 적극적인 분들이 수다스럽지 않은 우리 어머니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도 신기했다.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폭포수 같이 쏟아내도 묵묵히 들어주고 조용히 반응해 주는 어머니의 과묵함이 오히려 매력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런 작은 모임이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어머니의 일상에 큰 활력소였을 것이다. 언제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녁 먹기 전까지 신나게 웃고 떠들다가 가시는 아주머니들의 대화 속에서, 나도 방문 너머로 여러 정보를 귓동냥으로 들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은 사랑방이 된 우리 집이 그리 싫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 나와 동생이 커가고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도 하면서 그런 모임은 없어졌지만 아직까지도 시간이 되면 어머니께 전화해서 몇 시간을 통화하고 먹을게 생기면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신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을 구해서 살면서 사랑방 경험을 다시 하게 되었다. 땀내 풀풀 나는 남자들이 모여 야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운 곳이 하필 우리 집이었다. 안 그래도 좁아터질 듯한 거실에서 10명이 넘는 20대 남자들이 모여있는 건 참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 무리에 속해있다는 것은 나에게 '너는 이방인이 아니야'라고 안심시켜주는 듯이 굉장한 사회적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여러 과에서 모인 사람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내가 겪어보지 못해 몰랐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요즘 어떤 교수님 교양수업은 출석 체크만 잘하면 수업 때 졸아도 상관없어서 꿀이야, 그 수업은 과제가 너무 많아서 학점 잘 받고 싶으면 족보 달라고 해야 해, OO학번 ◇◇과 여신 실제 본 적 있어?' 등등…. 그 모임에는 재밌게 이야기를 잘하는 입담꾼들이 많았고 그 말솜씨에 감탄하면서 이야기보따리가 나오는 사람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워 듣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메세지를 보낼 손가락 힘은 아직은 넘쳐나는 것 같다.


  거친 사회 속에서 흙먼지 나게 굴렀고 열정과 젊음이 빠르게 마모되었다. 직접 시간을 잡아 사람들을 만나는 건 회사에서 일하느라 바닥을 드러낸 에너지를 박박 긁어모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메신저 단체방이라는 편리한 매개체를 이용하게 되었다. 왠지 모르지만 손가락만큼은 에너지가 넘쳤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응원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마음 편했다. 하지만 화면에 뜬 글자들 너머 상대방의 진심은 알기 어렵다. 나 또한 'ㅋㅋㅋ, ㅎㅎㅎ'로 도배된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한 번씩은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야 속이 풀리는 날이 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만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잘 맞물리면 모이는 건 의외로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럴 때 모임에서는 그동안 손가락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꼭꼭 숨겨둔 곶감 같은 맛깔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울이는 술잔이 늘어날수록 씁쓸한 이야기도 늘어난다. 익숙한 씁쓸함에 위로가 절로 나온다. 어찌 보면 이런 모임으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을 무참히 짓밟는 가젤 떼 같은 사회를 잠시나마 몰아낼 과 메마른 마음을 적실 시원한 물 같은 위로를 받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모임은 쏟아내는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담아주는 곳이다. 쏟아내는 것이 과하면 넘쳐 싸우게 되고 담아주기만 하면 채울 것이 없어 어색하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적당한 모임을 가지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하는 회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쏟아내는 사람만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힘과 위로가 되는 것 중 하나가 모임이지만 이것은 각자가 다 다를 것이다. 쵸우쵸우와 싸이후 같은 반려견이 될 수도 있고 생활력이 넘쳐나는 부모님이 될 수도 있다.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속 작가의 발자취를 통해 과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나의 활력소는 무엇일지 찾아가보길 바란다.

  


· 제  목 : 『아스라한 해바라기 밭』

· 저  자 : 리쥐안 / 옮긴이 : 김혜경

· 출판사 : 더라인북스

매거진의 이전글 [독후감] 책을 좋아해서 당신이 좋았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