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 여행기 (1)
세부 여행 2일 전까지 방 한구석에 펼쳐진 캐리어는 도무지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가기 싫었던 것은 아니다. 준비할 때 챙겨할 물건을 빼먹지 않도록 한 번에 준비하려고 하다 보니 시간이 미뤄졌고 어느새 이틀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여행을 이틀 남겨둔 그날 저녁, 이대로는 도무지 안될 것 같아서 미리 만들어놓은 물품 체크리스트를 펼쳐두고 하나씩 캐리어에 짐을 넣기 시작했다. 3박 5일이라서 가져갈 짐이 많지 않아 챙겨가는 24인치 캐리어가 너무 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실제 넣어보니 캐리어 반이 꽉 차서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이 판명 났다. 나머지 반은 여자친구와 함께 지인에게 나눠줄 세부산(産) 선물로 채워질 예정이었다.
여행에 돌아왔을 때 집안일이 밀려있는 것이 눈에 밟혀 편히 쉬지 못할까 봐 미리 빨래를 해놓고 화장실 바닥도 락스로 한 번 싹 닦아냈다. 마지막으로 집 바닥까지 물걸레질을 하고 나서야 여행 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체크리스트를 한 번 더 점검하고 잠에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는데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푹 잠이 들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날은 하루 전체 휴가를 냈다. 허리가 안 좋은 상태여서 오전에 한의원을 가서 치료를 받고 여유롭게 준비를 끝냈다. 원주에서는 공항까지 2시간 반 거리였다. 리무진 버스는 처음 타봤는데 프리미엄 버스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신 버스 짐 칸에 사람들의 캐리어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은 본격적으로 여행의 첫 장을 펼치는 것 같았다. 행선지가 국내 어느 곳이 아닌 바다 너머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는 공항이었기에 가까워질수록 셀렘도 더해졌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가족과 함께 일본 여행을 간 것이 첫 해외여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인이 되고 내가 준비해서 가는 첫 해외여행이라는 점에서 굉장한 의미가 있었다.
같이 세부에 가기로 한 후배 부부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출국절차를 밟아야 했는데 준비한 전자항공권(E-Ticket) 사본을 티켓팅하면서 보여주고 티켓을 받았다. 필리핀에 입국하려면 입국신고서인 이트래블(eTravel)을 미리 작성해야 빠르게 공항에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무언가 잘못 작성하는 바람에 잘 못하는 영어로 손짓발짓하면서 해명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차 확인했다. 비행기는 저녁 8시 10분 출발해서 세부까지 4시간 40분 걸렸다. 세부에는 현지시작으로 밤 11시 50분 도착이었다. 세부와는 시차가 1시간 밖에 차이가 안 나서 시차로 인한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필리핀 막탄 공항에 도착해서 모든 입국수속을 차질 없이 끝내고 바깥에 나온 순간 피부에 와닿는 뜨거운 공기를 느끼며 동남아 지역에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시간 비행과 늦은 시간으로 체력이 소진됨을 느낀 우리는 필리핀에 오기 전 미리 예약해서 우리를 픽업하러 온 숙소 사람을 빨리 만나고 싶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공항 출입구에는 필리핀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들 'WELCOME! OOO, 환영해요! OOO' 같이 한글이나 영어로 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들고 있길래 연예인이 왔나 싶었지만 그것이 아니라 대부분 한국 투숙객을 기다리는 현지 숙박업 종사자들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있는지 바쁘게 눈을 돌리며 찾았는데 한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아직 도착을 안 한 건가 생각하던 와중에 길게 늘어진 무리의 끝 쪽에 홀로 우리가 예약한 숙소 이름인 'Eloisa Royal Suites(엘로이사 로열 스위트)'가 써진 팻말을 한 손으로 들고 무덤덤하게 서 계신 현지인 분을 발견했다. 예약자 이름이 써진 것도 아니고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로 써져 있어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쳐서 헤맬 뻔했지만 운 좋게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안내하시는 분은 무덤덤한 표정과는 상반되게 친절하게 짐을 실어주고 운전을 하셨다.
필리핀 도로는 신호가 많지 않고 오토바이가 굉장히 많았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오토바이들 때문에 내가 보기엔 사고 날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았는데 운전하시는 현지인분은 그것이 일상인 듯 별 말없이 처음 만난 무덤덤한 표정 그대로 운전하셨다. 공항에서 출발한 지 10분 뒤 숙소 도착 후 방 카드키를 받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틀었다. 에어컨이 없으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은 더위었다. (위대한 발명품 에어컨!) 다음날 숙소 체크아웃하자마자 이동할 호핑투어 때 입을 옷과 물품을 미리 준비해 놓고 나서야 한숨 돌리고 숙소 창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인지 도로변 쪽 방 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차 소리 때문에 잠을 잘 못 잘 수도 있다는 후기를 본 터라 푹 잘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새벽이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각에도 도로를 느긋하게 달리고 있는 오토바이들을 빈번하게 볼 수 있었다. 숙소 오는 길에 잠깐 봤던 도로상황을 봤을 때 필리핀 사람들은 웬만한 배짱 없이는 운전하기 힘들 것 같았다. 피곤함이 몰려옴과 동시에 곧 다가오는 아침에 숙소비에 포함된 조식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나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숙소 주변을 산책하면서 새로운 것들에 대한 감정을 사진으로 남기고 오는 걸 좋아한다. 남들보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게 뿌듯하다고 해야하나.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숙소로 돌아오면 허기가 져 있다. 평소 집에서는 아침을 먹지 않는데 조식에 이렇게 집착하는 거 보면 어떻게 아침을 안먹고 살까 스스로 신기하다. 조식 시작 시간을 체크하고 나서 필리핀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