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 여행기 (4)
허리 통증이 자고 일어나서도 지속되어서 간단하게라도 검진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자마자 숙소 내 위치한 클리닉(작은 의료시설)에 갔는데 직원분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상태라서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다른 직원분이 클리닉 앞에서 서성이는 나와 여자친구를 보고 환자라고 바로 눈치를 채셨는지 간호사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간호사분이 오길 기다리면서 '영어로 허리 통증을 뭐라고 이야기하더라?' 고민을 심각하게 했다. 도움을 준 직원분의 호출에 급하게 오신 간호사분이 문을 열어주고 클리닉 오픈준비를 하는 동안 책상에 배치된 안내문 중 'Back Pain'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드디어 내 증상을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저렇게 쉬운 단어였는데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민망하기도 했다.
8시간 동안 통증을 줄여주는 약과 파스를 받고 방으로 돌아와서 체크아웃 전 남은 시간, 숙소 내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려는 여자친구가 자전거와 카누 타는 것을 구경했다. 화려한 무대를 벗어날 시간이 되자 일행 모두들 조금 더 있고 싶다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하루 정도 더 있으면 완벽했을 것 같았지만 아쉬움이 있어야 지금의 추억이 곱씹을수록 더 아름다울 수 있기에 마음을 정리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숙소 로비에 도착했을 때 펑퍼짐한 곱슬머리를 머리띠로 고정시킨 분이 누군가를 찾는 모습이 보였는데 느낌상 우리가 예약한 시티투어 가이드분 같았다. 그 분에게 다가갔더니 예약자인 내 이름을 대면서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셨다. 픽업 예상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오셨는데 우리가 숙소를 떠나기 전 체크인을 하면서 받고 쓰지 못한 웰컴드링크 쿠폰을 쓰고 오겠다고 말씀드려 출발은 예상시간 엇비슷하게 맞춰서 할 수 있었다.
가이드분은 호핑투어를 시작으로 필리핀 세부에서 일하신 지 오래된 베테랑 가이드셨다. 필리핀에서의 오랜 생활로 살이 현지인 못지않게 타셔서 언듯 보면 필리핀 사람들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 부분에서 우리의 마지막 필리핀 일정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 같았기 때문이다. 제법 큰 밴으로 이동을 했는데 운전자 분은 비포장된 길을 여기저기 다니시느라 고생하셨지만 우리는 넓은 공간에서 편하게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가이드 분은 차에서 이동하는 내내 자신이 경험한 필리핀에 대한 것들 중 흥미롭고 재밌는 토막 상식들을 열심히 알려주셨는데 우리와 다른 필리핀 문화에 신기해하고 잠깐 겪은 필리핀이지만 신호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이 이해되면서 유익한 여행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말씀하신 몇 가지 필리핀 토막 상식에 대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부는 가이드분의 개인적인 견해가 있기 때문에 감안하고 보길 바란다.
1. 필리핀에서 서울말 같은 표준어는 '마닐라어'라고 한다. 세부어는 우리나라의 제주도 방언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2. 1999년 필리핀의 막탄과 세부를 이어주는 2번째 다리(뉴 브릿지)를 일본에서 건설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다리를 지어주는 대신 일본 공장 외 다른 나라 공장이 필리핀으로 오는 것을 제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필리핀에는 일본차 조립 공장들이 많아졌고 현지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도 일본산 제품이 많다.
3. 우리가 방문한 관광지들 중에 개인 소유인 장소가 많다. (시라오 가든, 탑스힐, 레아 신전 등) 특히 탑스힐은 본래 세부 소유였으나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돈을 많이 벌고 탑스힐 자체를 통째로 사버렸다.
4. 필리핀에서 수도인 마닐라에 사는 사람이 제일 잘 산다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세부 사람들이 잘 산다.(이 이야기는 필리핀 현지인이신 가이드 분의 와이프가 알려주셨다고 했다.)
5. 우리나라 사람들이 필리핀 여행을 와서 물건을 사기 위해 아얄라몰, SM몰에 많이 온다. 한국의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아얄라몰 사장은 세부사람으로 주업은 부동산인데 부업으로 아얄라몰을 연 것이라고 한다. SM몰은 'Shoes Market'의 줄임말로 중국계 화교가 중고신발 판매를 하다가 시작한 쇼핑몰 사업이라고 한다.
6. 우리나라에서 중고 옷 수거함은 깨끗하게 관리하여 필리핀으로 수출된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중고 옷이 인기가 굉장히 많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옷 품질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구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7. 필리핀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가이드 분이 필리핀 교육문화를 겪으며 우리나라와 다르다고 느낀 건 필리핀은 왕따나 일진, 학교폭력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부자든, 가난하든 사교육 없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기 때문에 부의 차이에 따른 열등감이 없는 편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춘기 시절에 급격한 변화로 갈등은 겪는 경우가 많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8. 필리핀에서는 결혼과 이혼의 과정이 다 어렵다. 필리핀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서 굉장히 신중한 편이다. 왜냐하면 필리핀에서는 동거하는 사람들이 많아 만약 서로에 대한 감정이 변할 경우 법적인 구속이 없으니 자유롭게 떠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각 관광지를 다닐 때마다 그 장소에 담긴 여러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씀해 주셔서 시티 투어의 풍미를 더했다. 필리핀 오기 전, 시티 투어를 예약할 때 일정을 봤을 때는 소개된 모든 곳을 다니기 어려워 보였는데 현지 날씨에 따른 도로상황과 교통상황에 도통하신 가이드 분 덕택에 대부분의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저녁도 투어 일정에서 안내한 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이드 분이 안내해 주셔서 한 단계 더 퀄리티가 높은 식사를 했다. 귀국 전 마지막 마사지 서비스까지 빈틈없이 알차게 시간을 채워주시고 친절하게 마지막 인사까지 해주셔서 여행의 마무리가 완벽했던 것 같다. 이후에 귀국해서 가이드 분과 함께한 투어 후기를 정성스럽게 써서 업체 카페에 공유까지 할 정도로 감사한 마음이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 나가본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의 최고 장점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 장소, 일상생활 등을 경험하면서 '난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는 깨달음으로 생각의 확장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왕복 2차로에서 실선이 도로의 중앙선이지만 일본은 흰색 점선이 중앙선이다. 내가 경험했던 세상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까운 타국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 생각만이 옳다는 고집을 내려놓으면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진다. 그래서 주변에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 분들이 까다롭지 않고 성격이 원만한 이유가 그런가 싶었다. 이번뿐만 아니라 다음에도 해외에 나갈 기회가 많아져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