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
"사랑의 힘을 믿나요?"
작년까지 누군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단언컨대 "아니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를 잘 믿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도 다 믿기 어려운 세상인데 어찌 뜬구름 잡는 '사랑의 힘' 따위를 믿겠는가.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어렵다. 그저 함께 있을 때 행복하면 사랑일까? 아니면 스킨십을 해야만 사랑일까?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상대를 아껴도 사랑일까? 자주 표현해야만 사랑일까?
도대체 사랑이 뭐지?
아내에게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면서도 사랑이 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아내의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는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그려지게 되었다.
명절을 맞이하여 아내의 할머니 댁에 갔다. 예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함께 맞이해 주셨지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할머니만 쓸쓸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당시에 할머니는 참 정정하셨다. 여기저기 마실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고, 그 때문인지 동네에 모르시는 분이 없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와 사별하신 뒤로는 이상하리만큼 건강이 나빠지셨다. 특히 허리가 안 좋아지셔서 보조기구가 없으면 혼자 보행이 힘든 정도였다. 아마도 상실감이 몸과 마음을 더욱더 약하게 만든 것 같았다.
가볍게 명절 인사를 드리고는 할머니 앞에 앉았다. 할머니께서 넌지시 말씀을 꺼내셨다.
"너희는 절대 다투지 말고, 잘 지내래이~"
손녀 부부가 잘 살고 있는지, 서로 다투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신 것 같았다.
"나는 너거 할아버지랑 다툰 적이 없다. 다만 할아버지가 술을 좋아했다이가~ 가끔씩 술을 많이 마셔가지고, 취하면은 그때나 좀 투닥거릴까, 그거 말고는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그래가 술도 못 마시도록 했는데 그래 갈 줄 알았으면 그 좋아하는 술이나 왕창 마실 수 있게 하는 건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도 할아버지 덕분에 지금 내가 살아있는 기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2년이나 지났는데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의아했다. 할머니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작년에 내 허리 수술할 때 나이 때문에 마취가 위험하다 안카나, 의사가 마취 자체도 위험하고 마취하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3년 정도 줄어드는 거라고 수술할 거냐고 묻더라. 고민은 되는데 그래도 우짜노 아파죽겠는데, 근데 아니나 다를까 수술하고 마취가 제 때 안 깨어난 기라.
그때 마취에 취한 건지, 사경을 헤맨 건지, 비몽사몽 하고 있는데 갑자기 너거 할아버지가 나타나가지고 내 허리 아픈 데를 그래 씨게 때리는 기라, 이게 뭐 주먹도 아니고, 팔꿈치로 수술한 데를 그래 자꾸 눌러가면서 때리데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한테 말했지.
'때리지 마래이~ 아프다~ 때리지 마래이~ 내 아파 죽는다'
그러고 딱 마취에서 깨어난기다. 나중에 간호사한테 들으니까 마취된 상태에서 계~속 '때리지 마래이~'를 반복하고 있었다네. 그래서 간호사는 '아니 제가 할머니를 왜 때려요' 했다데 내가 우스워가"
할머니는 잠시 미소를 지으셨다.
"어쨌든 그때 나는 느그 할아버지 아니었으면 아마 못 깨어났을 기다."
할머니의 눈시울은 붉어져있었다.
할머니의 말씀을 다 듣고 어쩌면 이런 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만약 할아버지가 할머니 꿈속에 진짜 나타나신 거라면 그만큼 할머니를 사랑하셔서 죽어서도 지켜주시려 했던 것이고, 혹 할머니만의 착각이라 하더라도 사경을 헤매면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할아버지였다는 것이니까.
어렴풋이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건 자주 표현을 하거나 말거나, 스킨십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그저 죽어서까지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 사경을 헤매는 마지막 순간에도 떠올리게 하는 마음, 그런 마음 자체가 바로 사랑 아닐까? 우리 부부도 언젠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그런 존재가 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