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지능은 인간을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을까?
요즘 생성형 인공지능, 챗 지피티가 (Chat-GPT) 연일 화제다. 챗 지피티란 사용자가 입력한 내용에 기반해 문장을 생성하고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대화형 인공 지능이다. 출시된 지 단 오일만에 가입자가 백만 명을 돌파했고, 혹자는 아이폰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의 혁명과 비교하기도 하니 없던 관심도 생긴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렇게 호들갑일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하게만 들렸던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사차 산업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거론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인간의 영역을 대체 - 혹은 침범 - 할 수 있을까 는 최근의 화젯거리가 아니다. 컴퓨터가 발명된 시점부터 인간은 우리가 만들어낸 조그만 (당시의) 상자를 두려워했다. 새 천 년을 앞두고 날짜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컴퓨터가 전산 시스템을 망가뜨려 모든 것이 마비가 된다 느니, 그래서 군 필자가 군대에 다시 입대하게 되는 비극이 생길 수도 있다 느니 하는 우스운 상상들이 난무했으니 말이다. 비교적 최근의 예로는 이 세돌 구단과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 대결도 있다.
챗 지피티의 능력은 실로 대단해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료를 취합하고, 정렬하고, 편집해 논문은 물론이고 보고서에서부터 시, 소설과 같은 독창적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불과 몇 분이면 충분하다. 인간의 뇌와 닮은 인공 신경망이 구축되어 있다고 하니 과연 그 한계는 어디이며 어디까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너무 궁금한 나머지 챗 지피티에게 요즘 작업하고 있는 웹사이트에 들어갈 내용을 부탁해 보았다. 질문을 하자 몇 초 만에 필요한 자료가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났다. 직접 작업하였다면 검색과 정보 취합에만 몇 시간을 꼬박 할애해야 했을 터이다. 취합된 정보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수많은 전문가들이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니 앞으로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내 식대로 조금 손을 보자 그럴싸한 게시글이 완성되었다. 하루를 꼬박 할애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업이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나자 유능한 개인비서를 얻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를 부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작품성은 차치하고 이 모든 작업이 일 분이 채 걸리지 않는 것을 보니 사무적은 기능은 물론 언어의 장벽, 표현의 한계, 심지어는 창작이란 고유한 세계를 초월함은 물론, 시간의 제약에도 구애받지 않는 아주 영리한 녀석이었다.
현대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놀랍게도 – 인터넷의 등장이 아닌 – 바로 세탁기의 등장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빨래하는 데만 하루 종일 걸렸던 여자들이 노동시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곧 자본창출로 이어지면서 사회가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챗 지피티가 방대한 자료를 훑어 필요한 것들만 걸러내고 재정비하는 노동 시간을 크게 단축해 준다는 점에서 생산성은 극대화되고,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격변의 시기를 지나는 듯하다. 대학가에 비상이 걸리고, 교수님들이 바짝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이제 우스갯소리가 아닌 현실이다. 이미 온라인 배움으로 인해 나라 간의 교육 장벽이 허물어 진지 오래고, 얼마든지 컴퓨터 앞에서 원하는 정보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될 즈음이면 대학이라는 과연 곳이 존재할까 싶다.
본질로 들어가 인간의 고유 영역, 그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머지않은 미래에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또 생겨 날 것이라고 한다. 예술가, 운동선수, 작가 등 창작의 영역만은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독창성은 로봇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굳게 믿어왔던 많은 이들에게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인공 지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감성과 창작의 영역마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이러한 발전은 어디까지가 의도된 것이고, 허용된 것이고, 불가피한 것이고, 막을 수 없는 것인지 모호하다.
우리 집 일곱 살, 다섯 살 두 꼬맹이들은 티브이와 휴대폰,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른다. 아직 어려서이기도 하지만 굳이 틀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행하는 만화 영화나 게임은 알지 못하지만, 다른 신체적 취미 활동을 하며 여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대중화와 낮아진 사용 진입 장벽은 미디어에 대한 노출을 최소화 하자는 원칙대로 키워온 지난 수년간의 가치관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케 한다. 실제로 일곱 살 어린아이에게 챗 봇을 주었을 때 어른보다 높은 활용도를 보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니 로봇과 상호 작용하며 배움 그릇의 크기를 넓혀 가는 것이 미래의 각광받는 교육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챗봇과 대화하며 감정 소통보다는 정보를 얻기 위한 소통을 지속하다 보면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인공지능이 건네는 교육만으로 온전한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
결국 인공지능과 로봇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인간 다움’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남겨준다. 인공지능이 무엇이든 답변을 줄 수 있는 시대에, 앞으로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부모로서 내가 가르쳐야 할 것과 독립적 인격체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 배워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상상력을 발전시키고, 왜?라고 질문하는 힘을 키우고, 나아가 윤리적 문제까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생각의 끝에 남는 것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사랑과 공감뿐이다. 세월이 흘러도, 무수히 변화하고 흔들리는 가치관 속에서, 로봇에게 많은 것을 위임하고 위임당한다 하더라도 사랑과 공감은 인간 대 인간이 할 수 있는, 고유하고도 유일한 권한이자 능력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기반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 다움의 종착역이자, 부모로서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이자 위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