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라 단편소설>
*열역학 법칙 시리즈는 제0법칙 ~ 제3법칙 총 4편으로 업로드됩니다.
열역학 제1법칙
물리 선생은 칠판에 크게 쓰더니 다시 예의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흘린 글씨체의 끝이 기운 없이 떨어졌다.
"에..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의 에너지 총량이 일정하다.. 에.. 그런 것으로.. 다른 말로 하자면 고립계의 에너지 총합이 일정하다는 것이에요.."
7월의 끝자락에 매달린 햇빛은 있는 힘껏 열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전히 물리 2 보충 수업은 오후 1시 30분이었지만, 이제는 식곤증보다 불쾌하게 달라붙는 더위와 씨름하느라 지쳤다. 분명 수업을 듣는 학생은 20명이었는데 21명이 졸고 있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물리 선생도 프린트물에 고개를 박고 그대로 웅얼웅얼 읊는 것으로 보아 수업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좋아하는 여자 아이와는 어떤 대화로 말문을 열면 좋을까?" 같은 수업을 해주면 좋을 텐데.
지난 2주 간 보충 수업을 하며 틈틈이 유나와 대화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당연히 그런 기회 따위는 없었다. 수능 선택 과목 고작 하나 겹친 것으로는 같은 반도 아닌 유나와 말을 섞을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특별한 이벤트를 부여받지 못한 고립계는 18년 간 이어져온 역사다. 그녀와 18년 간 별 한 마디도 안 한 사이인데 조급하지 말자고. 내일로, 내일로 미루었지만 아직도 그 첫 대화는 아직도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하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었다. 하준이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말문을 트게 도와달라거나, 자리를 만들어 달라거나 하는 등의 흔한 연애 조작 작전 말이다. 3일 만에 포기한 어림없는 작전이었다. 말이 소꿉친구지, 유나와 하준은 인사나 하루 걸러 하루 하는 쓸데없는 상호 시비 외에는 진득하게 대화하는 일이 없었다. 고등학생 즈음 되면 그런 나이가 되는 것이다. 공부에만 온전히 집중하기에도, 이성과의 감정을 철저히 외면하기에도 애매한 나이.
아니, 어쩌면 열역학을 공부해야 할 시간에 사랑의 역학 같은 사이비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 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하준이처럼 체육 특기생으로 이미 대학 입학이 결정 난 거라면 몰라도.
나는 곤히 잠든 옆자리의 하준을 쳐다보았다. 하준은 물리 2 같은 불합리한 과목을 선택한 나를 따라서 보충 수업을 선택했다. 하준의 여자 친구는 그게 바보 같다고 하준의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하준은 그저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여자친구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매서운 눈으로 시속 140km/h 대의 직구를 던지는 하준이를 멍청하게 웃게 만드는, 나만큼이나 가깝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친구.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대각선 앞에 앉은 유나를 바라보았다. 또, 또, 열기관, 하고 어느새 일어난 하준이 내 볼을 찔렀다.
그러니까 그날 역시 평소처럼 우리 반 교실로 돌아가 두 어 시간 자습을 하고, 종례를 하고, 그다음에는 집에 가면 되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벤트를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손가락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저기, 연지원 맞지? 하준이 친구"
"어, 어어.."
나는 당황해서 하준이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유나는 나를 가리켰다.
"물리 공부하다가 잘 모르는 게 있어서. 다른 애들이 그러는데, 네가 물리를 제일 잘한다며.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
이건 한 마디로.. 비상이다, 비상! 비상 체제를 가동한 내 열기관이 다시 펌프질을 시작했다. 하준은 내 머리에서 나는 김을 보고 그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 번 툭툭치고 교실을 나갔다.
물리에는 자신 있다. 이 세상 모든 변화를 기술하는 학문이 물리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안의 열기관은 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난제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아주 떨떠름하게 반 걸음 돌아 내 자리에 다시 앉았다.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을 줄 알았던 그 애는 하준이 앉았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러니까 내 옆.
나의 개인 과외는 보충학습이 끝나고 개학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리 2 보충 수업이 끝날 때면 하준은 언제나 바로 자리를 피했다. 명분은 연습이었으나, 연습 시간과 겹치지 않더라도 눈에 띄게 자리를 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유나가 "둘이 혹시 싸웠냐"라고 반복적으로 물어보며, 혹시 그 이유가 본인 때문이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하준의 노력과는 별개로 유나와 나의 관계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애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딱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친구이긴 하지만 만나는 시간은 물리 2 보충 수업이 끝난 시간이 유일하다. 대화하는 내용도 친구, 가족, 취미, 연예인이 아니라 오직 물리. 우리는 이렇게 그냥 변하지 않는 동료 정도일 뿐인 걸까?
어느 날 유나는 이렇게 물었다.
"주변에서 에너지를 받는 계(시스템(system): 물리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공간 또는 물체)가 왜 고립계야? 고립되어 있지 않은데 말이지. 우주만 예를 들어도 그래. 우주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생명이, 천체가 생겨나지만 고립계라고 부르잖아."
"사실 모든 에너지가 변하지 않고 일정하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
나는 프린트물 중앙에 쓰인 수식 하나를 펜 끝으로 툭툭 쳤다.
Q=ΔU+W
유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ΔU는 의 내부 총 에너지고, W는 외부에서 한 일의 양이잖아."
나도 화답했다.
"맞아, Q는 외부에서 흡수한 열의 양이고. 어떤 계가 '고립계'이려면 ΔU 값은 0이 되어야 해.
물론 전체 고립계에서 전체 에너지(U)가 변하지 않는 건 맞아. 하지만 열에너지나 역학적 에너지 같은 형태로 바뀔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고립계라는 말을 쓰는 거야. 내부에너지 변화랑이 외부에서 가한 일만큼 변한다면, "
Q=ΔU+W = 0
"더 이상 그 물체의 열에너지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외부에서 한 일(W)만큼 내부 총 에너지(U)가 변하면 열(~온도) 에너지는 바뀌지 않는 거구나!"
유나는 깨달았다는 듯이 까르르 웃었다. 귀에 울리는 하이톤의 소리 파형이 간지러웠다. 고개를 들었더니 유나는 내 이목구비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너는 지금 고립계가 아닌 거구나?"
그 애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볼에 걸린 연홍색 미소에 나는 그보다 더 짙게 물들었다. 지금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일지 알 만 했다.
나는 열기관이었다. 아주 작은 자극에도 큰 열 변화를 얻을 수 있는 열기관.
세상에서 가장 열효율이 좋은 연지원 기관.
제2법칙에서 계속
* 소설 진행의 원활함을 위해 열역학에 대한 설명은 축소/과장되었을 수 있습니다.
열역학 제0법칙. 어떤 계의 물체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
열역학 제1법칙.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열역학 제2법칙. 고립된 시스템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점점 증가한다.
열역학 제3법칙. 절대 영도에서 엔트로피는 0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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