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다이어리 2017 #4, 토레스 델 파이네 공원 O 트레킹
12월 8일 (트레킹 3일 차)
가는 길이 멀지 않아서 아침에 서두르지 않고 일어났다. 그룹으로 온 사람들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뜨거운 물만 받아서 수프를 먹고 커피도 마셨다. 아침은 살짝 아쉬웠다. 산장에서 보이는 풍경은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인다. 산장 안에는 그룹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어서 산장을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바라도 보이는 빙하가 있는 산들이 멋있다. 산장은 정말 그림 같다.
딕슨 산장- 로스 페로스 캠핑장 Campamento Los Perros (11 km) 9킬로/4.5시간
느지막이 나서도 되지만, 딱히 산장에서 할 일도 없고 해서 천천히 준비를 하고 8시 반 딕슨 산장을 출발했다. 숲으로 덮인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자 뒤편으로는 딕슨 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앞으로는 계곡이 보였다. 조금 더 걷자 조그만 폭포가 나타났다.
길은 숲으로 접어들었고 숲 속에서 예쁜 꽃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오늘은 꽃을 관찰하는 날로 정하고 꽃이 나오면 사진을 찍으면 천천히 걸었다. 꽃들은 익숙하고 어쩌면 이름을 말하면 알고 있는 이름일 것 같았는데 이름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만 다리로 강을 두 번 건너갔다.
길은 약간 오르막이었고 돌도 많았다. 길은 강가로 접어들었고 풍경이 확 펼쳐졌다. 저 멀리 산봉우리들이 보였다. 강가의 조약돌이 깔린 길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가다 보니 캠핑장 사인이 보였다. 천천히 놀면서 왔는데도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로스 페로스 캠핑장
아직 열두 시도 안됐다. 어쨌든 왔으니까 텐트에 가방이나 부려놓고 체크인을 하러 갔다. 여기는 산장은 없고 텐트만 있는데 세론 캠핑장처럼 나무 텐트 패드가 없고 땅 위에 바로 텐트를 쳐놨다. 관리인이 사는 듯한 조그만 나무집을 두드리자 자다 일어났는지 긴 담뱃대를 문 젊은 남자 하나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나타났다. 퉁명스레 텐트를 배정해주고 다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버렸다.
배정받은 텐트는 아침에 게스트가 떠난 후 정리를 안 해 놓은 것 같았다. 투덜투덜하며 다시 가서 다른 텐트로 바꿔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짜증이 잔뜩 앉은 얼굴로 나오던 젊은 친구를 다시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배낭을 풀어놓고 말린 과일이랑 비스킷으로 대충 점심을 때웠다. 조금만 가면 경치가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가보려고 했는데 나와 보니 날씨가 흐려지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어서 강가까지 갔다가 다시 텐트로 돌아갔다.
텐트에 누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스페인 남자 둘이 옆 텐트로 들어가는 소리가 나고 하나둘씩 다른 트레커들도 오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날 캠핑장에서 할 일이 없는 트레커들은 관리인이 사는 숙소와는 좀 떨어진 곳에 역시 나무로 지은 식당 건물로 가서 다들 음식을 만들어 먹고 카드 게임을 하거나 그냥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뜨거운 물이나 좀 얻어볼까 하고 갔다가 끼리끼리 모여 앉아 있어서 말 붙이기가 좀 뻘쭘해서 그냥 돌아왔다.
늦은 오후가 되자, 관리인이 일어났는지 가게 문을 여는 것 같았다. 그 안에는 난로도 피워두고 있었다. 무료한 트레커들은 가게에서 맥주를 사서 마시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찬 맥주보다는 독주 한잔이면 딱 좋은데...슬리핑 패드가 젖어있어서 관리인에게 좀 바꿔달라고 했다. 점심때 퉁명스레 굴더니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니었던지 싹싹하게 대답하고 엑스트라도 패드를 하나 더 갖다 주었고 뜨거운 물을 좀 얻을 수 있나고 하자 난로를 막 피워서 물이 안 끓었다며 좀 있다가 오면 주겠다고 했다. 좀 있다니 막 끓고 있는 물을 담아 주었다. 그 물로 컵라면을 먹었다.
비가 오고 있어서 좀 추웠는데 엑스트라로 갖다 준 패드를 하나 더 깔아서 냉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내일은 길이 멀어서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일찍 자기로 했다. 오늘이 생일인데 생일 케이크는커녕 캠핑장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신세라니 하하하. 처량하다거나 외롭다거나 슬프거나 하지 않은 걸 보면 여행을 떠나와서 그런 걸까?
12월 9일 (트레킹 4일 차)
로스 페로스 캠핑장-그레이 산장 Refugio Grey (22km) 9.5시간
일찍 일어나려고 알람을 맞추고 잤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일어나 조용히 가방을 꾸렸다. 뜨거운 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지만, 어제 경험으로 보아서 이 시간에 관리인을 깨우는 것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어제 받아둔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비스킷과 과일 등등으로 아침을 먹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틀째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니까 속이 좀 허하긴 했다.
텐트를 정리해놓고 조용히 나오니 캠핑장에 일어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옆 텐트의 스페인 아저씨들이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곧 떠날 것 같았다. 물을 채우고 여섯 시에 캠핑장을 나섰다.
넘어야 할 가드너 패스는 천 미터가 좀 넘었다. 캐나다에서 천 미터 정도면 껌이지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오르막을 올라갔다. 스페인 아저씨들이 뒤에서 나를 따라와서 가다 보니 한 팀처럼 같이 가고 있었다. 올라갈수록 눈이 많아지면서 산이 눈으로 얇게 덮고 있었다. 캠핑장에서는 진눈깨비 같았는데 고도가 높은 위쪽에는 눈이 내린 것 같다. 남반구의 12월이면 계절로는 여름인데 이 한여름에 눈이 온다. 남극 가까이 내려와서 그런 모양이다.
두 시간 넘게 오르막을 오르고 숲을 하나 지나자 너덜의 비탈이 나타났다. 너덜인데 눈까지 덮여서 길을 찾기 어려웠다. 스페인 아저씨들과 길을 찾아서 천천히 올라갔다. 확트인 곳이라 저 멀리 언덕처럼 생긴 곳이 가드너 패스인 것 같았다.
John Gardner Pass 1190m
패스까지는 경사가 꽤 있었다. 경사가 심한데 눈이 많이 쌓여서 짚으면 쭉 미끄러졌다. 눈을 다져서 발 디딜 곳을 만들며 올라가야 하는데, 스페인 아저씨들은 보아하니 평소에 눈 볼일도 별로 없고 눈 덮인 산을 올라본 적도 없는 것 같으니 러셀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내가 앞장을 설 수도 있지만, 힘을 쓰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 하고 있는데, 길 아래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세론 캠핑장에서부터 같이 가고 있는 가이드와 함께 그룹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이드가 오면 앞장을 서려니 싶어서 스페인 남자들에게 저 사람들을 기다리자고 말하고 거기서 그 사람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가이드가 올라와서 왜 안 가고 기다리는지 물었다.
“위험해 보여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어. 너 먼저 올라가. 따라갈게.”
뭐라고 투덜대더니 가방에서 크람폰을 꺼내 신고 러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트레킹 그룹이 가면서 다져진 길로 올라갔다. 괜히 힘 빼지 않고 기다리길 잘했지. 가이드를 앞세우고 올라가는 길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패스에 올라서는데 반대편 쪽에서 레인저가 나타났다. 길이 위험하지 않은지 살펴보러 온 것이라고 했다. 패스 바로 밑쪽만 조심하면 그다음부터는 괜찮을 거라는 말을 하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O코스에서 제일 힘든 곳이라고 하는데 눈이 와서 그렇지 눈이 없으면 별로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패스 위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쟈켓을 꺼내 입고 모자를 쓰고 바람에 벗어지지 않게 앞을 꽉 조였다. 패스를 지나서 내려가는데 경사가 심한 너덜 길이 발을 잘못 내디뎌서 삐끗할까 봐 살짝 불안했지만 길은 경사가 완만해졌다. 패스를 넘어오자 눈은 없는데 전날 비가 와서 길이 많이 질퍽거렸다. 가끔 내리막이 가팔라질 때 나뭇가지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파소 캠핑장
패스 앞에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올라오느라 시간이 보내서 파소 캠핑장 Campamento Paso에는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 도착했다. 캠핑장에 묵고 가는 사람보다 그레이 산장까지 내려가는 사람이 더 많은지 식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작은 대피소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옆에서 물을 끓이고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뜨거운 물을 얻어서 미소국을 만들어 비스킷과 함께 먹었다.
파소 캠핑장에서 그레이 산장까지는 구 킬로미터 더 가야 한다. 내려가는 길 옆으로 그레이 호수 위에서 자라고 있는 넓게 펼쳐진 빙하를 볼 수 있었다. 내려가면서 보는 빙하는 멋있었다. 사다리도 나오고 다리도 몇 개 건넜다. 언덕을 넘어가니 그레이 빙하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왔다. W 코스로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도 이 빙하를 보기 위해 그레이 산장에서 빙하가 보이는 전망대까지 올라왔다 내려간다. 그렇게 해야 W 코스가 완성된다. 빙하로 가득한 그레이 호수를 보면서 잠시 쉬고 길을 계속 갔다.
그레이 산장 Refugio Grey
많이 지쳐있는 상태로 걷고 있는데 그레이 산장이 나타났다. 얼마나 반갑던지. 체크인을 하고 벙커 베드가 두 개 있는 방을 배정받았다. 방에는 반대편 침대를 차지한 사람이 있었다. 조용히 배낭을 풀고 짐을 챙겨서 샤워를 했다.
식당에서 파는 맥주는 비쌌다. 한 병에 3500페소라고 했다. 그래도 한병 사서 마셨다. 힘든 길을 걸어왔는데 이 정도 보상은 해줘야지. 맥주를 마시고 나오는데 스페인 아저씨들을 만났다. 원래 산장에 예약을 못해서 텐트에 예약을 했는데 산장에 자리가 있어서 산장으로 옮겼다고 했다.
저녁은 같이 오던 그룹투어팀에 섞여서 같이 먹었다. 그들은 내일 파이네 그란데까지 가면 트레킹이 끝나고 거기서 까따마란을 타고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아침에 나는 일찍 출발해야 해서 못 볼 것 같아서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방으로 가보니 벙커베드 모두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아침부터 많이 걸어서 피곤해서 일찍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