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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Apr 13. 2021

플라스틱 러버의 엉켜버린 일상


"엄마, 양말이 없어."

유치원 가는 막내딸이 말한다.

그래? 엄마가 오늘 빨아 놓을게.

엄만 어제도 그렇게 말했잖아.

어, 어제는 비가 많이 와서 빨래를 못했어.


어설픈 변명을 뒤로하고 서랍 구석에 숨겨진 줄무늬 양말 하나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오늘은 양말 빨래를 해야 하는구나.

늦은 아침을 한술 뜨고 양말 짝을 골라 담는다. 때 묻은 양말을 뒤집을 때는 내 아이 것이라도 썩 기분이 좋진 않다.

한가득 양말을 정리하다는데 전화가 왔다.


둘째 언니다. 얼마 전 형부가 돌아가셔서 차를 팔아야 한단다. 사별의 슬픔을 애도하기엔 뒷감당할 것이 너무 많아 바쁜 모양이다. 공감해 줄 새도 없이 내 앞엔 할 일이 많았다.


통화를 끝내고 싱크대로 향했다. 어제저녁 마트에서 산 유리 반찬통이  씻겨져 있었다. 이참에 플라스틱 반찬통을 퇴출하겠노라 결심을 하고 쓸만한 건 챙겨두고 남은 것이 가관이다. 몸이 없는 것, 뚜껑이 없는 것, 배달용기.  모두 뒤섞여 한가득이다.


갑자기 냉장고 문을 연다. 그 새 먹다 남은 반찬과 재료들이 뒤 엉켜 어지러웠다. 반찬통 정리는 그새 잊어버리고 냉장고를 뒤적이며 치웠다. 못 먹는 것, 안 먹는 거 왜 그때그때 처리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쌓여만 가는 것을.


주방엔 꺼내놓은 플라스틱 반찬통들의 잔해와 냉장고를 비운 음식물과 재료들로 가득했다. 문득 조금 전 정리하던 양말이 생각나며 급히 욕실에 가서 세제를 넣고 물에 담가 불려 놓았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오니 헛웃음이 다.

도대체 한 번에 몇 가지 일을 하는 건가.


요즘의 내 일상이다.

자수를 조금하다 갑자기 떠오른 캘리그래피 연습을 하고, 빨래를 하다가 마당 텃밭에 씨를 심고, 눈에 들어오는 책을 한자 읽으려면 책상 위 먼지가 눈에 띈다.

산만하기 이를 때 없이 난해하다.

이게 지금의 나다.


처음부터 플라스틱 반찬통을 선호한  아니였다. 아이들이 어릴 땐 생협활동을 하며 나름 친환경적으로 살기 위해 애도 다. 어느 순간 유리 반찬통 패킹에 때  빼기가 귀찮아지면서 설거지 할 때 무겁다는 이유로 하나 둘 신세계처럼 받아들이던 플라스틱 통들. 이제라도 정리를 좀 하리라 다짐해 본다.


가볍고 쿨해 보이지만 뭔가 몸에는 해롭고 잘 섞지도 않을 플라스틱 같은 일상.

당장의 편리함을 쫓아 코앞만 보고 살았는데 불현듯 뭔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냉장고를 보며 생각한다.

넘칠 때는 얼른 나누어 함께 배부르고 모자랄 땐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 줄 아는 지혜.


일상의 편안함에 물들어 적당히 타협하는 내게 플라스틱 용기들이 던진 울림에 답하려 주방 정리하다 말고 글을 쓰고 간다.


엉켜진 내 일상도 언젠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제자리를 찾길 기대한다. 시골 주부의 일상은 특별할 게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글 하나를 썼다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무엇인가 가득 차서 터져 나올 때  그때 글을 쓸 수 있구나. 오늘을 살며 배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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