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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아 Oct 04. 2022

바쁜 것 자랑하지 말기

2022.10.02

바쁜 건 자랑할 게 아닌 것 같다.


나는 해야하는 일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나쁜 버릇이 있다. 미처 끝나지도 않은 연구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게 끝나기 전에 벌써 다른 주제를 시작한다. 수업도 안 들어도 되는 과목까지 꽉꽉 채워듣는다. 이번 학기는 내가 청강을 안 하는 첫학기인 것 같다. 과행사 진행할 사람이나 친구들이 부탁할 일이 있으면 내가 제일 먼저 지원한다. 구글 달력에는 빈 칸이 없다.


왜 굳이 이렇게 바쁘게 사느냐고? 바쁘면 기분이 좋으니까. 내가 괜히 중요한 사람인 것 같으니까. 인문학도 인류도 시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작고 작은 나란 인간이, 막 발길질을 해서 일렁이는 물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 조금은 더 커 보이니까.


게다가 이런 바쁜 모습이 내가 알던 성공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슈퍼맘이라는 말은 너무 익숙하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회사도 나가고. 나는 자녀도 없고 취업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이미지로 날 정의하고 있는 듯하다. 공부도 하고 강의도 하고. 괴테도 연구하고 비디오 게임에 대해서도 쓰고. 수업 틈틈이 컨퍼런스도 준비하고 노조 대표도 하고.


그래서 바쁘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바쁜 것이 이미 훌륭함이니까. 빽빽한 스케줄은 면죄부다. 한 두 가지 잊거나 빼먹어도 "그럴 수 있지, 넌 이것저것 하는게 많으니까" 라고 스스로가 또 주변 사람들이 내 실수를 봐주는 도구. 연구도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난 타인의 두 배를 하고 있으니. 그럴 수 있지. 짜증이 나면 사람들에게 짜증을 풀어도 "난 쉬지 못해서 신경이 예민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럴 수 있지."


그러면 안되는 데도 "그럴 수 있지."


나는 바쁨의 혼돈으로 나 자신을 밀어 넣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는 게 많다는 핑계가 있어야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 말고, 성심성의껏 연구하는 것이 조금은 두려운 사람 말고, 짜증을 주변 사람들에게 "풀어도 되는" 사람 말고, 여유롭게 차곡차곡 내 일을 할 수 있는만큼만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그릇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여기서 구체적으로 쓰진 않겠지만, 내가 이것저것 떠맡는 것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학계도 한 명이 자신의 몸과 시간을 갈아넣어 여러 명의 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해내길 종용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피하지 못했으니까. 그걸 알고있으니 오로지 나만을 탓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너무 나 이외에는 바꿀 수 없다.


바쁜 것을 창으로도 방패로도 쓰지 않기. 나부터 내려놓고 두렵지만 한껏 약해져보기. 있는 그대로의 나体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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