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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아 Oct 09. 2022

한국어라는 감정의 쓰레기통

2022.10.06 + 2022.10.08

외국 사는 사람들은 다 알 것 같은 이야기. 평소에 한국어는 정말 쓸모없다. 쉽게 배울 수 있는 비슷한 나라말도 없고 ("일본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 로망스어군이 서로 비슷한 것에 비하면 한국어랑 일본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읽는 것부터 배워야하니까.) 그렇다고 어딜가나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외국어를 배우다보면 왜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일까, 짜증날때도 있다. 차라리 뫄뫄였으면 삶이 쉬웠을텐데!


하지만 그 점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건 내 감정을 글로 표현해도 오로지 나만의 생각일수도 있다는 거니까.


한국 친구들과 미국에서 농담으로 한국가서도 아무말이나 하는 실수를 할까봐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미국에서는 우리 생각을 여과없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 식당에서 음식이 맛없으면 맛없다고, 잘생긴 사람이 걸어가면 멋지다, 잘생겼다고, 연극이 재미없었으면 돈 아까웠다고. 하지만 한국에선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누군가가 우연히 듣고 상처받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어쩌다가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독일어로 궁시렁거려도 아무도 모르는 게 미국 중서부인데, 한국어 정도면 안전한 것 같다. 


그렇게 한국어는 점점 더 나에게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간다. 마음에 안 드는 일,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일단 한국어로 글을 쓴다. 아무도 몰랐으면 싶은 마음이니까. 일기장에도 쓰고 자투리 종이에도 쓴다. 갈겨 쓴다.


예를 들면 워낙에도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았어서 그런지, 괜히 감정에 북받쳐 유인물에 이렇게 적었다.


"제대로 과제를 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공부하는 게 너무 싫다. 심각하지도 않으면서 여기 앉아서 시간낭비 해야 하는 게 너무 싫다. 나는 더 이상 한글의 세계에 살지 않는데 화내고 슬퍼하려면 한국어로 돌아가야 하는 게 너무 외롭고 싫다."


물론 불만을 영어로 표현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너무나 큰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혹시 대충 과제를 한 친구에게는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닐까? 나중에 내가 무슨 연유로든 제대로 과제를 못했을때, 이렇게 나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는 친구가 있으면 어떡하지? 난 그 매몰참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럴 때 그냥 한국어 몇 마디를 적는 것만으로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돌아보니 이건 대학생 때부터 시작된 오래되고 나쁜 버릇이다. 처음에는 잘 모르겠는 걸 감추려고 시작했던 것 같다. 누군가 내 노트를 보고 "그거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지적하는 게 싫었다. 동기는 도와주려고 했던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순간이 수치스러웠다. 캠퍼스에서 늘 외부인 같았던 내가, 모두가 동등하다고 (잘못) 믿었던 수업 중에도 나는 백인보다, 미국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서. 그때부터 잘 모르겠으면 한국어로 적고 본다. 모르면 물어보는 게 배우는 사람의 자세이겠지만, 그 날의 작지만 강력한 수치스러움이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아서, 내 멋대로 내 주변에 한글로 안전지대를 쌓는다. 나중에 혼자 찾아보면 되니까. 


그게 습관이 되었더니 잘 모르겠는 것 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 같은 우울한 감정을 한국어로 적어낸다. 사실 모르는 것, 말이 안 통한다는 그 마음 자체가 참 슬프고 우울한 마음인 것 같다. 그렇게 내 주변을 감싸는 한글이라는 작은 비누방울은 점점 더 두꺼워진다. 온전히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세상. 안전한 나만의 생각, 나만의 세상.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대학생 때 친구들과 모여서 한국어를 썼었나? 한국인 친구들과 농담으로 외고 다닐 때보다 지금 한국어를 더 많이 쓴다고, 미국에 와서 한국어가 제일 많이 늘었다고 얘기했었다. 한국에서보다 미국에서 시를 더 많이 읽었다. 좋은 글을 필사하고 모으는 데 매달렸었다. 그래서 지금 갑자기 브런치에 영한사전까지 찾아가며 한국어로 글을 쓰고 있나? 겨우 영어로 글 쓰는 게 더 익숙하고 쉬운데, 지금 와서 한글을 찾는 건 독일어가 주는 막막함이 날 19 살의 그 때로 돌아가게 해서일까? "그게 아니야," 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말이 안 통하는 그 순간을 한글 뒤에 숨어서 견뎌내다 보니, 그 시간이 또 다시 외로움을 불러와서.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의 고마움을 새삼 느낀다. 한번 벽에 부딪혔을 때 한글에 매달려 견뎌내었으니 이번에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내 마음을 구겨서 한국어 한 구석에 던져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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