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핌 Jun 14. 2022

곰치국은 어쩌다 유명해졌을까?

cooking essay

매년 5월 경 강원도를 다녀오는 길이면 우리는 으레 묵호에 들러 곰치국 한 사발을 먹었다.




고향이 강원도이신 부모님은 일찍이 서울에 상경하여 가정을 꾸리셨다. 살스럽지 못하고 무뚝뚝한 집안 내력인지는 라도 친척들과 친근하게 왕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 명절 때 가끔 외가댁에 방문하여 차례를 지내던 기억이나, 여름방학 강원도의 큰아버지 댁에 머물렀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내가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 돌아가셨고, 20살쯤에는 외할머니도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후로는 더더욱 친척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집안의 이가 아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일도 없어 명절의 우리 집은 식구들 먹이겠다며 분주하게 음식을 만드는 엄마 외에는 휴일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인가 부모님은 5월경 강원도의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시기 시작했다.

언니들이 모두 결혼을 하고 나 혼자 집에 남았을 즈음 언제부터인지 나도 그 길에 동행을 하기 시작했다.




강원도까지 먼길을 가기 위해선 전날 일찍 자야 하는 게 맞았겠지만, 밖에서 시끌벅적 퉁탕거리는 소리에도 세상모르고 잠을 자는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음식을 만드느라 새벽까지 부엌을 떠나지 못하셨다.


엄마는 생선을 굽고 산적을 만들어 간단하게나마 모양을 낸 제사음식을 도시랑 통에 하나씩 채워 나갔다.

새벽 1~2시까지 잠 못 이루고 도시락을 챙기시고는, 새벽 5시 이른 출발을 위해 몸을 일으키셨다.

전날 저녁 10시부터 푹 자고 일어나신 아빠는 이미 밖에 나가 차를 대기시켜놓고 커다란 기름 걸레로 차를 닦으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엄마를 재촉하셨다.

나는 집 안팎을 부지런히 오가며 짐을 싣고는 '열쇠', '핸드폰', '지팡이'를 외치며 부산스럽게 들락거리는 엄마를 챙겨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계획된 출발시간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강원도를 향해 출발했다.


모두 깨어 있는 출발의 시작은 쓸데없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투닥거리시는 부모님을 말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졸음을 기 위해 아는 레퍼토리를 방출하는 아빠의 흥얼거림이 '산토끼'를 무한 반복하기 시작하면 휴게소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엄마와 운전 교대를 하였다.

그때까지 면허가 없던 나는 뒷좌석에 편히 앉아 옆 자석에서 잠이든 아빠를 대신해 엄마에게 말을 걸고 입에 사탕을 넣어주며 여정을 함께 했다.




집에 가는 길은 잊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빠는 주소도 없는 산소를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은 채 잘도 찾아가셨다.


아버지의 선산은 길이 없는 밭 너머 우뚝 솟아있는 언덕이었는데, 아빠는 최대한 가까이 차를 댄 후 전날 엄마가 준비한 제사음식이 담긴 배낭을 둘러매고 앞장을 섰다.

풀숲으로 덮여 어디가 길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아빠는 익숙한 듯 막대기로 풀숲을 헤치며 성큼성큼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낑낑거리는 엄마를 밀고 끌며 가파른 풀숲을 5분 정도 헤치고 올라가자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며 할아버지 산소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모든 친척들이 모인 앞에서 산소 끄트머리에 서서 노래를 불렀던 바로 그곳이다.

그때는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 입관 후 집안의 가장 막내인 나에게 친척 어르신들이 노래를 시키신 거였다.

당시 시의 적절하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어머님 은혜를 목청껏 불렀다.


산소의 풀들을 다듬고 배낭을 펼쳐 돗자리에 간소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절을 하고 술을 올리고 또 절을 하고, 우두커니 산소를 바라보던 아빠는 술잔과 몇 가지를 챙겨 순식간에 풀숲으로 사라지셨다. 할아버지 산소 위 여러 개의 조상님 봉분이 있어 그것을 챙기러 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아빠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무릎이 아픈 엄마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돌아오자 싸 가지고 온 음식들을 풀어 다 함께 둘러앉아 늦은 식사를 했다.




다음 목적지는 엄마네 산소였다.

이미 할아버지 산소에서 음복으로 소주 한두 잔을 하신 아빠는 이른 아침부터 운전으로 인한 고단함이 밀려오셔서인지 옆 좌석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지셨다.

엄마는 '본인 할 일 다 했다고 저런다'며 투덜거리시며 운전석에 앉으셨다.

역시나 내비게이션 따위는 켜지도 않으시고 새로 생긴 길을 따라 산소에 도착했다.


새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큰길 아래 입구도 없는 언덕 앞이었지만, 올라가는 길을 확신하고 차를 새운 뒤 엄마는 만반의 준비를 시작하셨다.

무릎 연골이 모두 닳아 없어진 엄마는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른다며 무릎보호대를 하고 파스를 붙이고 진통제를 삼키고 지팡이를 잡으시며 마음을 다잡고 가파른 산길 앞 준비를 마쳤다.


잠에서 깬 아빠는 엄마가 건네주는 배낭을 말없이 둘러메고 또다시 앞장을 다.


초입의 가파른 언덕만 통과하면 그 뒤로는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심호흡을 하고 가파른 언덕을 조심스레 올라갔다. 문제의 언덕을 무사히 통과하고 능선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갈림길 나무에 리본이 메어져 있었다.

앞서 오빠네가 다녀갔나 보다며 몇 마디 중얼거리는 엄마의 말투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묻어나 있었다.

그렇게 30여분을 걸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산소에 도착을 했다.


두 번째 제사상을 차리고 절을 하고, 돗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옛날이야기가 하나씩 꺼내어졌다.

두런두런 옛이야기를 하다가 졸고 있는 아빠를 깨워 늦기전 하산을 서둘렀다.


늦은 5월이지만 한낮의 등산을 마치고 나니 모두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익숙한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발을 담그니 뼛속까지 시려온다. 역시 동해의 바닷물이다.





시골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허름한 모텔 숙소를 잡은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임원항으로 향했다.

매년 강원도를 방문할 때마다 회를 먹기 위해 오는 곳인데, 여기저기 공사를 거치며 올 때마다 조금씩 모습이 변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대로인 안쪽 골목에서는 변변한 수족관도 없이 커다란 고무대야에 그날 잡은 생선들이 뻐끔 거리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하게 생선 몇 마리를 골라 자리를 잡으니 커다란 접시 위 산처럼 쌓인 회 한 접시가 들어왔다.

스끼다시 따위는 없는 강원도식 상차림은 콩가루가 뿌려진 야채와 함께 오로지 회를 주인공으로 먹으면 되었다. 우리는 회로 배를 채우고 숙소에서 하루치 고단함에 빠져 잠이 들었다.


다음날, 1박 2일의 산소 방문 강행군의 마지막 여정은 역시나 묵호였다.

길이 막히기 전 출발해야 한다며 아침부터 서둘러 숙소를 나와 묵호항 인근의 식당에 들렀다.


매년 방문하는 익숙한 식당으로 들어가 곰치국을 시키며 엄마는 '하얗게 주세요.'라고 한마디 외쳤다.

잠시 기다리면 복지리와 비슷한 빛깔의 뽀얀 곰치국이 커다란 사발에 담겨 상 위에 올랐다.


시원한 곰치국으로 아침 해장을 하며 힘을 얻은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강원도의 마지막 휴게소에 들러 전망대에 올라 커피 한잔을 마신 후 재 정비를 하여 서울로 향했다.




곰치국


나에게 곰치국은 굉장히 맛있는 음식임에든 틀림이 없지만, 투박하고 수수한 국 한 사발이었다.

강원도에 다녀오는 길에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특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곰치국을 위해 강원도를 방문한다던가 하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저 곰치국을 떠올리면 부모님과 함께한 산소 여행이 생각나는 추억의 음식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TV 속 음식 소개 프로그램에서 마주한 곰치국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10년 전 이라지만 6,000~7,000원에 불과했던 곰치국이, 물곰탕으로 이름이 바꿔 불리며 3만 원이나 하고 있었다.


헉!! 이게 무슨 일 이래!

그 투박하고 못생긴 물컹물컹 생선국 한 사발이 3만 원이라고!

나는 너무 놀라 TV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가 아는 곰치국과 물곰탕이 다른 것일 꺼라며 애써 부정해 보았지만 역시나 같은 음식이었다.


우리가 늘 방문하던 허름했던 칠형제곰치국 집도 맛집의 반열에 올라 여러층짜리 건물이 되어 있었다.


곰치국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니, 곰치국을 파는 이들에게는 좋은 일이니 어쩌다는 이렇게 됐냐는 질문을 잘못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참으로 궁금하다. 단지 TV에 몇 번 나왔다고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내가 제주도로 오고 난 뒤에도 매년 두 분이서 강원도행 산소 방문을 다녀오셨다.

하지만 얼마 전 70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나서는 더 이상 가시지 않게 되었다.

장거리 운전이 어려울뿐더러, 엄마의 무릎 상태로는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으니 함께 있을 때 좀 더 많이 따라다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잠실에서 17년, 화정에서 17년, 제주에서 10년 떠돌이 인생을 산 나는 부모님의 고향 강원도가 마음의 고향인지라 왠지 그립고 아쉽다.


주소도 모르는 그곳을 내가 찾을 수 있을까?

언제라도 다시 한번 가 볼 일이 있을까?


먼 훗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곰치국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다 말하는 신랑과 함께 기억 속 그곳들을 다녀올 수 있기를 남몰래 희망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식탁에는 밑반찬이 없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