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의 나만의 인연을 바탕으로 한 영화 '탈주' 리뷰
영화 ‘탈주’ 스포일러 주의!
상근예비역으로서 군복무를 한국예술종합학교 근처 석관동 일대에서 했다. 예비군 관리를 하면서 예비군이 법으로 정해진 훈련을 받고 예비군으로서 역할을 이행하게 할 수 있도록 저 밑바닥 업무를 하는 임무였다. 업무 특성상 꼬박꼬박 훈련에 잘 나가는 예비군들은 이름조차 낯설었고, 반대로 이름을 잘 숙지하게 되는 예비군은 보통 훈련 불참을 일삼는 다소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한예종 근처다보니 한예종에 재학하거나 졸업한 예비군들이 여럿 있었는데, 한 예비군은 훈련을 상당히 잦게 불참해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한 번은 보충훈련을 통지하려고 연락했는데, 영화 촬영이라고 참석이 어렵다고 했다. '어라? 이번 핑계는 참신한데'라고 생각하며 관련 증빙서류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때 제출한 사유서에는 영화 제목도 쓰여 있었는데, '전국노래자랑'이라는 제목이었다. 이경규가 제작하기로 알려져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었던 영화였다. 더 찾아보니 당시 흥행했던 영화에 배우로 참여하기도 했다. 원빈이 주연한 ‘아저씨’였고, 그의 배역은 "씨X놈아. 예수다. 내가 널 걷게 해 줄 거거든"이라는 대사로 인상을 남긴 바로 그 역할이었다.
전화로만 소통하다 한 번 보충훈련에 나왔을 때 그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직접 인사를 나누지 못했지만 - 예비군훈련에 나온 예비군들은 1년 중 가장 따분하고 불쾌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 불편케 하면 안 된다 - 이런 퍽 흥미로운 사연은 오랫동안 술자리 썰로 풀어내곤 했다. 매우 일방적이지만 진귀한 인연으로 나는 꾸준히 그의 필모그래피를 흥미롭게 지켜봐 왔다.
그러나 그당시 훈련을 연기하면서 제작한 그의 첫 장편 연출작 '전국노래자랑'은 실패했다. 이윽고 수지와 류승룡이 호흡을 맞춘 두 번째 작품 ‘도리화가‘도 작품 안팎으로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 참패했다. 세 번째 작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간신히 손익분기점인 155만 관객을 넘었다. 화제성을 낳으며 어느 정도 대중성은 챙겼지만, 성공한 대중영화 감독이라는 목걸이를 손에 쥐어주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평이었다. 그 이후에는 그렇다할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모처럼 퇴근 후에 할 일이 없으면 홀로 영화관엘 간다. 도파민 홍수의 시대에 어둠 속에서 오롯이 영화에 몰입하는 경험이 되레 진귀해졌다. 나쁜 평을 받고 있지 않은 영화를 골랐다. ‘탈주’라는 영화였는데, 이제훈과 구교환이 영화 포스터에 나왔다. 시놉시스로는 탈북의 과정에서 벌어진 신선한 소재를 다룬 극이라는 내용만 유추됐다. 개인적으로 북한인권을 주된 어젠다로 취재하는 언론사에서 일했던 경험과, 아는 탈북자분이 외로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허망함을 떨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최근에는 오물풍선이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가르면서까지 남쪽으로 날아오고, 미 대선 행보에 따라 핵무장이라는 꿈에 부푼 사람들이 신나게 인터넷 댓글창을 달구는 가운데 ‘탈주’는 북한을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그려낼지 궁금했다.
영화는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도전할 자유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행복추구권을 박탈당한 이들의 스토리를 그렸다. 아문센 위인전을 보고 탐험가의 꿈을 키워오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실패라도 해볼 수 있는 곳으로 탈주하려는 규남과, 피아니스트라는 꿈이 있음에도 북한에서의 삶을 수용하고 엘리트 계층으로 적당히 살기로 결심한 현상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철책을 향해 달리고 달리는 이를 처절하게 가로 막는다. 쉽게 퉁쳐서 말하자면, 영화는 도전과 실패에 관한 보편적 이야기다.
‘양화대교‘라는 수미쌍관은 '실패할 자유'를 한 층 복잡케 한다. 운전수로서의 가장의 삶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양화대교'와 '탈주'는 일상(혹은 인생)의 고되로움을 노래한다. 굳이 의미를 더해보자면, 실패를 거듭할 인생 속에서도 기어코 행복을 느낄 일상을 완성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연대의식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까. 무수한 실패에도 아프지 말고,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보편성을 상징하는 가운데 북한, 귀순, 배철수, 양화대교라는 난데없는 조화로움은 무척 산뜻했다.
영화에 한껏 빠져들어 귀순을 결심한 이들의 마음도 짐작해 보고, 규남이 양화대교 위에서 청년사업으로 대출 승인 문자를 받아 희망에 부푼 모습에서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를 하겠거니 헤아려보는 와중에 영화는 에필로그를 띄웠다. 그리고 뜨는 이름은 낯익은 이름이었다. ‘아저씨’에 출연해 얼굴을 널리 알리고, ‘전국노래자랑‘를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훈련 자주 불참했던 그 감독이었다. 연출자 이름은 이종필이다. 조금 더 영화에 대해 검색해 봤다면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아무 배경지식 없이 영화관에 찾았다가 우연히 엔딩 크레딧 첫 줄로 오랜만에 마주친 것이었다.
‘탈주’의 손익분기점은 관객 200만 명으로 알려졌다. 7월 19일 기준, 경쟁작들이 흥행 내림세를 타며 예매 1순위에 올라 누적 153만 관객을 기록하는 중이다. 개봉 3주 차에 들어서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처럼 힘겹게 적자를 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그의 필모에선 성공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탈주'에서 '양화대교'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으로 정성스레 어우려 낸 시나리오로 실패할 자유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가운데서 나는 그를 실패만 하는 대중감독이라고 폄하해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 대신 대중적인 성공이 아직 없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인터뷰에서 "관객들에게 어떻게 감정적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늘 고민하기 때문에 '탈주' 역시 감정적 만족감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듯 그런 맥락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다른 인터뷰에서의 그의 말을 또 인용하자면,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당황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모두가 직진하는 영화"라고 했듯 '탈주'는 매우 의미하는 바가 컸다.
앞으로 이종필 감독이 성공하는 대중영화 감독이 되길 응원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면서 살다가 우연히 다시 조우하는 날까지 서로 힘냅시다! 아문센의 가르침을 전하며 이 감독에게 행운이 깃들길.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것을 불운이라 부른다."
사족
영화에서 현상이 기남에게 선물한 아문센 책에는 현상이 "죽음이 아닌 의미 없는 삶을 두려워하라"라는 글귀를 적어놨다. 특별히 의미를 담아 사회주의 예술인이자 사상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명언(Do not fear death so much but rather the inadequate life)을 차용한 글귀로 추정된다. 브레히트는 극작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그가 선도한 소격효과(낯설게 하기)가 유명한 개념인데, 인터뷰를 보면 이종필 감독은 북한 사회를 그리면서 우리가 아는 북한의 인상에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우연일까, 노림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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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 감독은 지난 5월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극화한 영화 '파반느'의 크랭크업을 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열독률 높은 소설인만큼 과연 이번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