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플레이 '슈팅스타': 축구 생태계로 보는 성장주의, 엘리트주의
유럽을 여행하면 항상 권하는 여행 코스가 있다. 바로 행선지에 기반을 둔 축구팀의 경기를 직관해보라는 것이다. 대형 클럽이면 좋겠지만, 오히려 소형 클럽이거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하부리그 팀이라면 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나도 유럽에 갈 때마다 여행 일정에 무리를 해서라도 축구 경기를 포함시키는데, 그 경험이 무척 값지기 때문이다.
축구가 일상인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어느 지역단위에서든 연고를 둔 축구팀이 있는데,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가족 단위든 친구사이든 축구를 관람하는 문화가 잘 자리 잡혔다. 비유럽, 특히 한국에서는 스포츠 관람이 특정한 이벤트처럼 여겨지지만, 유럽에서는 경기장의 관객들을 보면 축구가 일상의 일부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날 것에 가까운 현장성과 고유한 지역성과 사람들의 문화가 짙게 묻어나 여행에서 체득할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을 느끼기 쉬운 곳이다. 그만큼 유럽의 많은 나라는 축구가 그 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동시에 커뮤니티의 끈끈한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최근 시즌 1 막을 내린 쿠팡플레이의 축구 예능 ‘슈팅스타’를 보며 깊은 감동을 느낀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요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스포츠 예능과 다르게 강건한 메시지를 담아낸 것이 느껴졌다.
프로그램 기획은 사뭇 새롭지는 않다. 다양한 축구인들이 모여 각자의 처지와 환경을 뛰어넘어 하나의 팀을 꾸려 현재 K4리그에서 활약하는 팀들과 가상의 리그를 꾸려 승격과 강등을 두고 진지하게 경쟁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그 여정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 개인의 열정이 집단의 활약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축구가 결국 공동체의 힘으로 성장하는 스포츠임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프로그램이 주는 교훈은 단순히 스포츠 영역 바깥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가치라고 느꼈다.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는 면면이 흥미롭다. 먼저 은퇴한 K리그 출신 프로 선수, 해외에서 유소년 생활을 지내다가 불가피한 일로 커리어가 꼬인 젊은 선수, 1부 리그에서 뛰었지만 지금은 4부 리그에서 활약 중인 현역 선수, 더 큰 무대를 꿈꾸면서 K4리거로 최선을 다하는 선수 그리고 장래의 슈퍼스타를 꿈꾸는 유소년 선수까지 등 다양한 배경과 성취를 가진 이들이 등장한다. 팀 슈팅스타의 이사, 감독, 수석코치는 전국민이 아는 레전드인 박지성, 최용수, 설기현으로 세 사람은 다양한 선수들을 하나로 꿰어내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또한 방송으로 꾸려진 팀일지언정 승리할 수 있는 팀이 될 수 있도록 합심해 진지하게 지도에 임한다. 은퇴 선수가 주축인 까닭에 프로그램 초기에는 '이제 은퇴했는데 뭐~'라든지 '방송이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정도로 웃음소리와 여유가 분위기의 과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무르익고 경기가 착착 진행되면서 모든 선수들은 "지고 나서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며 승부욕과 도전정신에 불타올랐다.
프로그램은 각기 다른 선수들에게 자극점을 짚었다. 유소년 선수들에게는 정상급 선배들과 같은 필드를 뛰면서 경험이 성장의 기회가 되었고, 은퇴한 선수들에게는 못 다 이룬 현역 시절의 꿈을 떠올리게 했고, 아직도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다. 한때 촉망받았으나 예상치 못한 이유로 커리어가 꼬인 선수들에게는 축구를 포기하지 않을 동력과 새로운 기회의 무대가 되었고, 현역 선수들에게는 더 높은 무대를 꿈꾸게 했다. 프론트와 지도자로 나선 박지성, 최용수, 설기현에게도 후배 선수들과 함께하며 K리그와 하부 리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여 한국 축구 성장에 기여한다는 동기부여가 작용했다. 모두의 상황과 환경이 다르고, 각자의 입장이 달랐지만, 같은 목표를 향한 노력과 헌신은 결국 축구 공동체 전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슈팅스타’가 던진 가장 큰 질문은 “축구의 발전이란 무엇으로 이뤄지는가?“였다. 많은 사람들은 박지성, 손흥민, 이강인 같은 세계적인 엘리트 선수를 배출하는 것이 축구 발전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축구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할 수 있을까? 엘리트 선수의 탄생 밑바닥에는 또 다른 환경과 배경이 있다. 나는 축구의 발전은 훌륭한 선수들이 육성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에서 이뤄진다는 가설을 주장하고 싶다. 다시 말해, 훌륭한 선수를 육성해내고 그 선수를 통해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축구 발전과 성과를 측정하고 판단할 명제인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축구가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이뤄질 순 없으며, 구성원 모두 그 안에서 고루게 발전한다고 볼 순 없다고 생각한다.
엘리트 육성 중심의 접근법, 즉 축구 선수로 유일한 목표를 최고의 리그 진출과 최고의 업적 달성에 두는 문화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결국 누군가의 축구 인생을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게 만든다. 최고 레벨이 아닌 영역을 실패로 규정하면, 결국 최고 리그에 도달하지 못한 선수들에게 과도한 책임과 부담이 전가된다. 최고가 아니라면 열등과 실패라는 프레임은 축구를 산업으로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데 한계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분명 K4리그에서도 뛸 선수는 반드시 필요하고, 이들을 지도할 역할도 있어야만 한다. 손흥민급으로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수많은 유소년이 축구를 배울 수 있게 축구 경력자는 교육의 영역에서 활약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커리어들이 한국축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점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
축구는 본질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팀과 공동체가 함께 성장해야 발전하는 스포츠다. 한 팀에 11명이 뛰고, 10개 이상의 팀이 리그를 치르며 경쟁하는 축구에서 중요한 것은 소수의 엘리트 몇 명이 아니라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시스템이다. 유소년 시절부터 다양한 실력과 스타일을 지닌 또래들과 부딪히며, 더 뛰어난 선수들에게 도전하고, 수많은 패배와 좌절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 비로소 한 선수뿐만 아니라 축구 공동체 전체가 성장할 수 있다. 엘리트와 비엘리트, 프로와 세미프로, 아마추어와 신인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최정상부터 최말단까지 균형 잡힌 스펙트럼이 형성될 때 축구 생태계 전체가 더욱 건강해지고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7부 리그서부터 커리어를 시작해 잉글랜드 최고 선수가 된 제이미 바디, 21세가 되어서 겨우 르망 2부팀에서 경력을 시작한 디디에 드록바, 하부리그에서 루저라고 소셜미디어에서 한탄하다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이 된 앤디 로버트슨, 프랑스 3부 리그에서 전전하다가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로 월드컵까지 들어올린 은골로 캉테가 축구팬들로부터 더 사랑받는 것도 이유가 있다.
한국 축구로 좀 더 논의를 좁혀보자. 한국 축구도 마찬가지다. K리그의 성공과 흥행은 하부 리그의 활성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K2~K4리그뿐만 아니라 지역 곳곳에서 펼쳐지는 작은 축구 경기까지 포함한 모든 요소가 K리그의 수준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프로팀 및 세미프로팀은 지자체, 기업,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고, 그 안에서 치열한 경쟁과 긴장이 형성될 때, 이는 자연스럽게 K리그의 수준을 높이고 국가대표팀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축구의 발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위로 전달된다.
이는 단순히 축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돈과 명예, 권력에 의해 계층이 나뉘는 우리 사회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강조하는 풍토 그리고 연봉, 부동산 시세, 자산 규모 등 경제 지표만이 행복의 지표와 동의어로 쓰이는 성장주의는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K리그도 못가면 그게 축구선수냐", "해외 메이저 구단 경험 아니면 실패한 축구 커리어"라는 관점이 불특정 다수에게 폭력적인 것처럼, 성장주의의 메시지들은 각 개인에게 매우 가혹하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는 우리 사회 많은 계층와 다양한 구성원을 포용하지 못한다. 함께 협력하고 경쟁하는 동시에 서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축구가 그러하듯, 사회도 더욱 단단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발전해야 한다. ‘슈팅스타’가 보여줬듯, 모든 구성원에게 ‘다음이 있는 삶’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슈팅스타’가 가장 크게 남긴 울림은 '다음이 있는 삶'이었다. 은퇴한 선수들에게는 인생의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유소년 선수들에게는 꿈꾸던 선배들과 함께 뛰는 기회를 주었으며, 커리어가 흔들리는 선수들에게는 다시 도전할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축구를 사랑하는 지역 기반의 클럽들에게는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개인이든 팀이든, 혹은 사회 전체든, 중요한 것은 늘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다음’을 꿈꿀 것인가.
지난 가을 K리그 막바지 강등권 팀들의 경기를 직관한 적이 있다. 대전월드컵경기장서 펼쳐진 대전 하나시티즌과 대구FC의 경기였다. 홈팀인 대전이 신승을 거둬 강등권을 딛고 올라선 경기였고, 대구에겐 강등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경기에 사방에서 함께한 대전 시민들을 봤다. 가족 단위 팬들도 많았다. 그들은 진지했고, 승리에 간절했고, 열심히 뛰는 선수들에 애착이 느껴져 그들 사이에서 정말 재밌게 경기를 볼 수 있었다. 그 경험을 통해 한국에서도 축구 생태계에도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응원하는 팀이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더라도, S급 스타 엘리트 선수가 없더라도, 우리 동네 축구팀에 관심을 갖고 기꺼이 서포터가 되는 것은 축구 생태계 전반에 '다음'을 보장할 것이다.
거제시민축구단, 서울 중랑 축구단, 연천 FC, 진주시민축구단, 평창 유나이티드 FC, 평택 시티즌 FC, 유감스럽게 최근 해체된 노원 유나이티드까지 앞으로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