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이 하교할 시간이면 초등학교 옆에 자리 잡은 카페로 출근을 한다. 카페는 문이 열린 날보다 닫힌 날이 더 많다. 카페 주인이 아닌 나는 내 카페인 듯 세콤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연다. 내가 마실 커피쯤은 능숙하게 내릴 수 있다. 가끔은 손님을 맞이하기도 한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고 스팀이 필요한 따뜻한 라떼를 빼면 웬만한 메뉴는 다 가능하다. 카페의 주인장은 큰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엄마이다. 우리는 그녀를 ‘낭만 카페 김 사장’이라고 부른다. (카페 이름은 따로 있음) 낭만을 좇느라 그런가? 그녀의 카페는 주인장의 출근 시간이 늦고, 퇴근 시간은 빠르다. 카페 가장 안쪽에는 3평 남짓한 룸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개인 수업을 한다. 매월 일정 금액의 세를 내며 빌려 쓴다. 온전한 내꺼 인듯하지만, 수업이 없는 오전 시간에는 카페를 통해 룸을 대관하는 모임에 내주기도 하며, 초등학교 하교 시간 이후에는 가끔 카페를 드나드는 어린이들이 라면을 먹기도 한다. 룸의 책장에는 나의 책보다는 카페 주인장의 책이 더 많이 꽂혀있다. 나는 종종 ‘이 공간에 내 물건을 두어도 될까?’라고 생각한다. 그저 일정 시간의 공기만이 내게 허락되어 숨을 크게 내쉬면 사라져버릴 것 같다. 오늘도 하루살이 인생을 살 듯 내꺼 아닌 공간을 스쳐왔다.
이사를 하면서 고심 끝에 거실 한편에 독서실 책상을 들였다. 거실과 주방이 연결되어있는 구조와 거실 벽에 매달린 티브이는 거실을 늘 분주하게 만든다. 함께 사는 이들이 모두 잠들면 그제야 온전한 나의 공간이 완성된다. 집으로 돌아와도 내꺼 같은 내꺼 아닌 공간이 있을 뿐이다. 80센티 폭의 공간은 노트북을 두고 사용하기에는 다소 좁은 크기이다. 새집으로 이사 가면 거실에 책장을 놓고 6인용 테이블을 놓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폭이 좁고 긴 창가 테이블을 거실 창에 가득 차도록 놓고 싶었던 로망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과 달리 번번이 남편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그리 넓지 않은 거실에는 티브이와 소파가 자리 잡았다. 이 집에서 나의 지분은 120센티 기본 크기의 책상도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나의 선택을 받은 독서실 책상은 식탁 의자 중 하나가 번갈아 끌려다니며 나를 앉혀 주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최대한 아늑한 분위기를 주기 위해 조명과 펠트지까지 옵션으로 넣은 녀석은 제법 그럴싸하며 거실 한편에 있는 녀석치고는 미관을 헤치지도 않는다. 이 녀석으로 인해 소파의 위치가 거실 정 중앙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치우치고 다이* 청소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밀고 들어온 녀석이라 남편의 타박을 조금 받기는 했다. 청소기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녀석이 안쓰럽지만 난 무척 고맙다.
두 남매가 어린이집 재원 시절.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노량진 학원가를 오갔다. 1인용 책걸상은 커다란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고, 맨 뒤에 앉은 이들은 칠판에 글씨가 안 보일 정도로 큰 강의실에는 중간에 커다란 티브이 모니터가 설치되어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큰 강의실에 학생들이 가득 채워진다는 사실이었다. 바쁘게 두 남매를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달려온 강의실에서 나에게 허락된 공간은 가로 폭 45센티의 작은 공간이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더 열악한 공간이 기다린다. 가로 폭 60센티의 접이식 유아 책상을 펼쳐 허리와 무릎이 아프도록 동영상을 돌려보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유아 책상이라 높이도 맞지 않아 한참을 앉아 책을 보면 허리와 무릎을 펼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고단했다. 나의 허리와 무릎이 너무 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접이식 책상 덕분에 나는 공인중개사가 되었다. (부동산을 오픈하거나 부동산에서 실장으로 일하지 않아도 자격증 소지자를 모두 ‘공인중개사’라고 부른다. 부동산을 운영하는 ‘공인중개사’는 ‘개업공인중개사’라 칭한다) 내 허리와 무릎이 고생한 보람도 없이 내 자격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다. 생각해보니 노란색 바탕에 알파벳이 가득했던 접이식 책상의 용도는 다양했다. 두 남매의 밥상이 되기도 했으며 모두 잠든 밤에는 나의 공부 책상이 되어 주었고, 내가 무언가 사브작사브작 만드는 밤에는 온몸으로 나의 칼질을 받아내어 주었다. 게다가 코로나 시국에는 두 남매의 온라인 수업에 사용되었으니 우리 가족을 위해 그의 한 몸 바쳐 희생하며 일하다 갔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물티슈로 열심히 닦아줘도 산뜻함이 돌아오지 못하던 녀석이다. 이사 오던 날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수년 만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는 녀석을 손으로 한 번 쓸어주었다. 다리 받침이 하나 빠져 움직일 때마다 손으로 끼워 맞춰 주어야 제구실을 할 수 있었던 녀석 덕분에 우리 가족은 편안했다.
나를 무엇으로 정의하면 좋을까? 가정주부라 하기에는 살림을 하지 않는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저녁 먹은 설거지가 아침까지 그대로 있다. 엄마라고 하기에는 우리 집 남매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 나의 시간이 더 많다. 선생님이라고 하기에는 간신히 지침서에 의지하며 수업을 연명하는 날라리다. 이렇게 나를 정의하기 힘들 듯 나의 공간도 정의하기는 힘들다. 내가 엄마이고 아내이고 선생님이고 안효정인 것처럼, 나의 공간도 책상이고 밥상이고 독서대이며 극장이기도 하다. 나를 아이들과 남편과 수업하는 어린이들이 만나듯 무엇 하나에 속하지 않고 정의될 수 없는 그곳에 내가 있다. 무엇 하나 온전한 내 것은 없지만 오늘도 ‘내꺼 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공간을 오가며 부족한 나의 일면을 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