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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 moon Sep 29. 2022

모르는 이의 위로가 더 크게 와닿는 날이 있다


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이다. 특히 사연 있는 한국 드라마. OTT 서비스에서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다고, 너무 재미있다며 주변에서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을 하며 앓아도 나는 큰 감흥이 없다. 큰 감흥이 없고 싶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워낙 과몰입을 잘하고 드라마에 빠지면 그 주인공의 감정선에 너무 몰입하여 그 인물의 기분에 따라 내 기분도 좌지우지 될 정도라 바쁜 현생을 위해 자제하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그렇게 미루고 미뤘던 드라마가 여러 편.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나희도의 연기를 보고 이건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물다섯 스물하나> 정주행이 시작되었다.


정주행 하기에 앞서 해당 드라마는 새드엔딩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무조건 꽉 닫힌 해피엔딩을 선호하는 사람이라(주인공이 시련 겪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은데, 이토록 주인공에 몰입하는 내 모습은 이후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이 드라마 시청을 시작하는 데에 더욱 오래 걸렸던 것 같다. 하지만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의견을 표현하는 나희도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려 넷플릭스에서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드라마 화면을 누르게 되었다. 펜싱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나희도의 모습이 예상했던 대로 잘 그려졌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코치님께도 고집있게 펜싱을 향한 의지를 표출하고, 군기를 바짝 잡는 선배 앞에서도 쫄지 않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회차마다 내 마음을 울리는 대사들이 있었지만 글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은 바로 7화에서 들었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고유림 선수가 나희도에게 져서 금메달을 '빼앗겼다'는 보도, 거기에 오심 논란까지 퍼지며 나희도는 첫 국제대회 금메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 코치님은 고유림 편이고 뉴스와 신문에선 온통 논란 이야기만 가득하다. 거기에 선수촌에서 쫓겨난 날 혼자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본인과 달리 고유림은 다정한 아빠의 품에 안겨 엉엉 울기도, 아빠가 끌고 온 트럭을 타고 집에 돌아간다. 자신의 피 땀 눈물로 일궈낸 결과가 짓밟히는 순간을 19살의 희도가 견딜 수 있었을까? 성인인 나도 견디기 힘들 것 같은데 말이다. 혹여나 누가 자신을 알아보기라고 할까 기차표를 예매할 때도, 기차 안에서도, 저녁을 먹으러 찾은 국밥집에서도 붉은 모자 안으로 자신을 숨기기 바쁠 뿐이다. 하지만 어쩌다 옆 테이블에 앉은 할아버지 일행이 본인을 알아보게 되고, 당연히 욕을 할 거라 생각했던 그들이 따뜻하게 건넨 말들에 희도는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가만히 보다가 그 장면에서 나도 희도를 따라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나를 잘 모르는 타인이 건넨 말에 위로를 받은 경험이 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 회사에서 힘들었을 때 엄마에게 그리고 내 개인 블로그에 해당 부분을 털어놓곤 했다. 물론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며 위로를 받으려 했지만 사실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나를 너무 잘 알기에 위로를 건네기에 한계가 있었을 거다. 나를 깊게 생각하니까 어떠한 말로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그리고 이 말을 건넨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음을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때 생각보다 나를 모르는 이들이 툭 던진 말들이 크게 다가왔던 때가 있다. 나를 잘 모르고 엄마를 통해 대충 상황을 전해 들었던 엄마 친구분들의 말, 그리고 내 블로그 일상글을 보고 본인의 비슷한 경험담이나 따뜻한 말을 건네던 블로그 이웃들. "걔네가 잘못했네."나 "저도 그런 적 있는데.."와 같은 말들. 나와 그 상황을 잘 모르니까 오히려 좀 더 가볍게 던질 수 있었던 작은 위로들 말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드라마 해당 장면을 보고 내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났고, 샤워를 하며 그 장면을 곱씹으며 그 때의 내가 떠올랐던 건 아마 나도 희도처럼 누군가가 따뜻하게 하지만 무겁지 않게 던진 위로에 기운을 차렸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새드엔딩은 너무 싫지만, 주인공이 마음 아픈 건 정말 싫지만 매 화마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대사와 장면들이 있어 남은 절반의 회차도 잘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모르는 이의 위로가 더 크게 와닿는 날이 있다. 날 모르는 이가 던진 말에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행복을 찾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생각도 못한 드라마와 장면에서 감동을 얻기도 하고 말이다. 이어지는 회차에서 희도가 힘든 날도 많다고 하는데, 주인공에 과몰입해서 괜한 감정 소모만 했다며 투덜거릴 때 7화의 이 장면을 생각해야겠다. 이 장면만으로도 이 드라마 정주행에는 큰 가치가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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