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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Apr 14. 2024

모아이 석상 요법

노답도 답이다!

본래 울적함은 그림자와 같아서 언제나 사람의 발 끝에 붙어 있는 법이다. 빛이 있는 시간과 거리만큼 음영을 달리할 뿐 사람은 모름지기 울적함을 한 켠에 업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 어느 때고 명치 끝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따끔거릴 쯤이면 나는 자연스럽게 시꺼먼 그림자를 마주보고는 한다.


울적 쿨타임이 찼다. 간만이다. 올게 왔다 싶었다. 기분 곡선은 리듬 게임과도 같아서 한참 구름 위를 날고 있을 때에도 순간의 방심으로 어, 내가 왜 이렇게 들떠있지, 라는 자각이 찰나의 순간 든다면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이 시작될 수도 있고 반대로 진흙탕 속을 기어다니다가도 오히려 좋다며 돌연 광기 어린 보령 머드 축제의 장을 펼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 가까운 미래를 생각 않는 게 상책이다. 예상과 추측, 대비와 예방이야말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사람 마음의 대척점에 꽂혀 있는 깃발일테다.


참 희한한 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을 때에도 기분이 한 없이 낮은고도를 달리는 시간이 있다. 그럴 때에는 오색찬란하던 세상은 제 색을 잃고 눅눅하게 가라앉아 버린다. 가장 밝고 강렬한 색조차 잿빛 먼지를 한 겹 덮어 쓴 것처럼 희뿌옇게 보이고는 한다. 본래의 형태는 무엇인지 몰라도 불투명한 막이 씌워져 있으니 불안과 초조함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답도 없는 질문을 하게 된다. 왜 내가 기분이 안 좋지, 가장 근원의 질문부터 해서 혹시 내가 이런 말을 해서일까, 저런 행동을 해서 일까, 와도 같은 스스로를 탓하는 추측을 할 때도 있다. 그런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눈두덩이처럼 불어나 이윽고 나를 깔아 뭉개기도 한다.


***

몇 해 전 심신이 고단한 나날 중 특히나 유난스러웠던 저녁이었다. 갑자기 터진 눈물을 주체 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다. 왜 그 친구였는지 기억이 안난다. 해당 친구는 따뜻한 머리와 차가운 심장을 가진 아이여서 우리 사이에서 박명수라고 불린다. 박명수랑 엠비티아이가 같기도 하고, 하는 말이 모질어도 틀린 구석 없어서 말로 얻어맞으면 최소 탈골이다. 그 때 대충 무슨 말을 했더라. 친구야,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다, 비속어, 비속어, 심한 비속어. 울며 불며 침대를 쾅쾅 치며 그랬던 것 같다. 친구는 수화기에 대고 제대로 알아 듣지도 못할 말을 하는 날 듣고 어떤 반응을 했더라. 그 친구랑 통화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나도 인간인지라 성장이란 것을 조금은 한 것 같다.


고통과 번뇌의 순간이 왔구나, 일단 즐겨, 와도 같은 마음가짐을 구색이나마 갖추게 되었달까. 마음이 단단해지셨네요, 이런 건 꽤나 헛소리다. 마음은 여전히 물렁하고, 정신머리는 지조 있게 사납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 확신을 갖게 된 건 확신 없이 살아도 살아는 진다는 경험에 기인한 체득이다. 아무렴 하찮은 위안은 된다. 자기변명으로 들릴 순 있겠다만 이 말은 꼭 해야 겠다. 내가 아무리 정신 붙잡고 살기 위해 애는 쓰지만 아무래도 내 두 발은 땅 위에 딱 한 치만큼은 둥둥 떠 있는 건 아주 불가항력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노답도 답이다. 물리의 법칙이 조금은 빗겨나있는 인생도 나름의 생이란 것을 몸소 증명해내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 말씀이다.


보이는 전봇대마다 다리 들고 오줌 싸는 강아지마냥 가는 길목마다 눈물 자국을 떨구고 다니는 나의 행보에 세상을 조금 냉냉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우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있다. 너무나도 일리 있는 말이다.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에 굳이 수고롭게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거니와 부러 아쉬움을 덧입힐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난 애시당초 냉냉한 사람이 아니다. 난 아주 온온한 사람이고 좋든 싫든 앞으로도 온온함의 울타리에 갇힌 삶을 살 확률이 훨씬 높다. 뗄래야 떼어지지 않는 천성적 온온함에 눈물도 많고, 짜증이나 화도 넘쳐 난다. 나는 기나긴 연구 끝에 감정 과잉의 상태를 상쇄 시키기 위해서는 감정을 여과시켜 결핍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모아이 석상 요법이라고 부른다. 누런 들판 위에 외따로 서 있는 모아이 석상을 떠올린다. 모아이 석상은 팔이 잘려나가도 울지 않고, 언덕배기 위에서 우두커니 서 있어도 짜증 한 번을 안낸다. 다음 생에는 돌로 태어나야지, 아득바득 이를 갈다가도 요가 매트에 누워 냅다 울거나 지하철 역에서 어깨빵을 당해서 신경질 내는 순간에 더 마음이 쓰인다. 모아이 석상은 울 일도 없고 화낼 일도 없겠지만 그래봤자 걔는 라일락 꽃 향기를 맡지도 못하고, 강물이 일렁이며 프리즘처럼 번져나가는 셀 수 없는 빛깔을 보지도 못한다.



인생사 희노애락 중 노애가 글꼴 궁서체에 폰트 크기 300인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희와 락도 어딘가에 스며는 있을거다. 오는 4월에는 꽃 향기도 더 맡고, 바깥 구경도 더 해야지. 10년 뒤에 기후 재앙이 현실로 다가오면 봄 나들이고 뭐고 다 역사책에서만 보는 과거의 유물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라는 말은 덧붙이면 안되려나?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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