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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Jun 30. 2023

병원 이야기

대한 외래

입원 기간 동안 부지런히 돌아다닌 환자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톱텐에 내 이름 석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운동을 해야 빨리 낫는다는 믿음 반, 지루함을 못 견디는 성질머리 반에 기인해 하루 반나절은 거진 병실 밖을 속절없이 누비고 다녔다.
평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교과서 삽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 마냥 역동적인 것이 늘 의문이었다.
그 속에서 아픈 사람들을 찾아보기란 거의 숨은 그림 찾기에 가까웠다. 입원 후 제일 먼저 알게 된 건 아픈 사람들 다 여기 있었구나, 하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모든 인간이 다 건강한 건 불가능한 게 맞았다.


내가 위치한 병실은 갑상선 센터 2층에 있었기 때문에 ‘대한 외래’를 통하지 않고는 다른 건물을 오가기가 쉽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입원할 필요가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대한 외래는 내가 입원하기 바로 전 주에 공사가 완료돼 개방된 곳이었다.
대한 외래는 암센터, 본관과 별관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다.
엄마와 내가 대한 외래에 지어준 별명은 공항이었다.
모든 게 하얗고 반짝반짝거리는 게 가히 3층 출국장의 느낌을 물씬 주는 데다가 환자와 간병인들이 가끔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게 출국현장을 방불케 했던 탓이다.
그리하여 나의 간병인과 나는 언제나 환자 출입증을 여권 삼아 공항으로 출국 수속을 밟으러 나갔던 것이다.


대한 외래에는 온갖 편의시설과 흥미로운 상점들로 넘쳐난다.
일단, 어린이 병동에서 파스쿠찌의 빨간 간판이 보이면 공항 출입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내 간병인은 항상 이 곳에서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몽글한 우유 거품을 만끽하고 대한 외래를 둘러볼 준비를 하는 거다.
파스쿠찌 맞은편에는 액세서리샵이 있다.
평소라면 두 번도 돌아보지 않을 곳이지만 차원이 다른 지루함과 무미건조함을 선사하는 병원인만큼 나는 매번 심혈을 기울여 탐구했다.
신상은 없는지, 이 머리핀의 가격은 저 머리띠에 비해서 합리적인지, 오픈 시간은 언제인지 등등.

가타부타를 따지고 나선 옆에 위치한 한식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식당의 이름은 가화원이다.
식당 옆에는 환자복을 입으면 출입이 금지되어있다고 쓰여있다.
처음에는 왜? 아니, 진짜 왜? 라는 물음이 가득했는데 바로 뒷줄에 병원균이 아동이나 노약자에게는 위험하다고 설명돼 있어 신속하게 수긍했다.
가화원의 메뉴는 비빔밥 위주다.
되게 푸짐하고 현란한 색으로 플레이팅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차례 식사를 마친 나의 간병인은 간이 싱겁다며 굉장히 짠 코멘트를 남기셨다.
가화원부터 통로가 끝날 때까지 맞은편 복도에는 의자와 탁자가 나열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병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쉬거나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는 그곳을 공항 라운지라고 불렀다.

푸드코트를 지나면 파리 크라상이 나온다. 공항답게 12시간 비행 없이도 파리에 갈 수 있는 시공간 포털이 존재한다.
파리 크라상도 내가 굉장히 공을 들여 구경했던 곳 중 하나다.
공들여 구경이라 함은 하루에 적어도 세 번(우리의 공항 출입은 주로 식간에 이루어졌다. 아침 후, 점심 후, 저녁 후)은 들어가서 상품의 품질, 상태, 가격 등을 골똘히 연구했다는 뜻이다.
특히 파리 크라상은 수술 전날 밤에 (수술의 공포에 휩싸여) 밥맛이 없었던 내가 마지막으로 섭취했던 음식을 제공해준 곳이기에 더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나는 딸기 크레이프 케이크를 먹었는데 아빠가 혹시 실수해서 이상한 걸 집어올까 봐 (전적이 화려하다) 2310호실에서 혼자 두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파리크라상과 푸드 코트 사이에는 빈 공간이 널찍이 있는데 그 공터는 아직 서울대병원 측에서 쓸모를 못 찾았는지, 준비 중인 건지 방치되어 있다.
물론 시간이 좀 흐르면 금방 제 용도를 찾아 단장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내가 입원했던 기간 중에는 그곳은 자유무역센터 마냥 환자나 간병인들이 조금은 예정 용도에 어긋나게 사용하는 것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벤치에 누워서 낮잠을 청한다거나, 차를 깔아놓고 미니 다과회를 벌인다든지 하는, 그런 자유분방한 곳이었다.
다음 외래 진료들 중에 탈바꿈한 그 공터를 만나고 싶다.

파리크라상과 맞닿은 곳은 잠바주스와 던킨 도넛, 배스킨라빈스 이 세 군데다.
사실 개인 취향으로 그런 디저트류라고 하면 거의 환장을 하는 타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기 크레이프 케이크 이후 퇴원 때까지 내가 몰래 찜해놨던 파리 크라상의 피칸 파이는 물론이고 병원식을 제외한 다른 간식이나 음식물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목이 상당히 불편하고 항상 산소 한줄기가 지나다니는 길 말고는 목구멍이 단단히 막혀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병원식이 아닌 다른 디저트류를 먹는 건 고된 일이었고, 사치라고 느껴졌다.
그렇기에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음식들을 쳐다만 봐야 했던 공항 산책 나날들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상당 부분 애틋하고 짠한 면이 없잖아 있다.

파리크라상이나 던킨도넛, 파스쿠찌 같은 카페들에는 하얀 가운이나 파란 수술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대부분은 자매품으로 크록스를 신는다.
그 사람들이 의료진이란 건 식별하기 쉽지만 사실 개개인의 정확한 역할이 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크록스 무리를 통틀어 나와 내 보호자는 언제나 ‘천재’라고 불렀다.
사실 ‘천재’가 맞긴 맞을 거다. 서울대병원을 아무나 가나. 심지어 환자복 입기도 그렇게나 힘들었다, 대기가 그렇게나 길다니.

모두 다 같은 역할이나 직업을 가진 건 아니겠지만 대한 외래를 가운 자락 휘날리면 다니는 것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봄 직한 일임이 틀림없다.
나는 다음 생을 노려야 한다. 그래도 피통 달고 대한 외래를 걷는 것도 그렇게 흔한 일음 아니기에 위안 삼고자 한다.
잘 관찰해보면 아무리 ‘천재’여도 그 사람들도 사람이기에 녹록지 않은 직장 생활에 전념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파리 크라상에서 한 ‘천재 1’이 옆에 있던 ‘천재 2’에게 “교수님은 뭐 사드려야 되지?”라며 고민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교수님의 취향과 입맛에 대한 끝없는 고뇌와 고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카페인의 유무, 핫인지 아이스인지, 휘핑크림은 얹는지 빼는지, 사이즈는 어떻게 할지 기타 등등. 의료인으로서의 본분만으로는 부족한 건지 ‘천재 1’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장면을 훔쳐보던 나의 간병인과 나는 저녁 시간에 맞추어 귀국해야 했기에 계산대에 놓인 최종 목록품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세계 일주를 마친 듯 심신이 피로하다.

눈을 감고 수면을 취한다.

꿈속에서 나는 침을 삼켜 멍해진 귀를 풀어준다.

쌀쌀해진 주변 공기를 덮으려 담요를 두르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다.

기울어지는 시야 너머로 흰 구름 조각들과 푸른 대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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