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음방학 04 8월5일-8일
동해의 이튿날이 밝았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니까 일출이 더 빨라서 그런가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그냥 늦게 일어난건가 흐흐, 뭐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시간 엄수에 진심인 친구 덕분에 일단 동해의 나날은 내 보통의 일상보다 더 부지런하게 흘러가긴 했다. 아침은 해물탕을 먹으러 갔다. 빨간 양념 국물에 자작하게 담구어진 해물 친구들. 깊은 국물 맛에 흰 쌀 밥을 야무지게 곁들여 먹었다. 전날 얘기한 것처럼 우린 한섬 해수욕장 대신 더 넓은 망상 해수욕장으로 가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해수욕에 필요한 타올이나 썬크림 같은 물건들 말고도 해수욕장에서 먹어야지 싶어서 전날 먹거리도 챙겨가고, 심심해지면 읽을 거리라도 있으면 좋겠지 해서 책도 싸갔다. 육지보다 바다에서 더 맥시멀리스트가 되어버렸지만 바다에 오래 있으면 뭐가 됐든 다 써먹겠지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날에도 억수 같은 장대비가 내렸고, 일기 예보에도 비 소식이 여행 기간 내내 있었던 차지만 실제로 빗방울이 머리 위로 뚝 뚝 떨어지기 시작하니 실로 망연자실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빗방울은 얄팍했다. 곧 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희한하게도 바로 건너편 하늘은 쨍쨍하니 맑아 보였단 말이다. 곧 그치겠지, 긍정회로를 열심히 돌리며 우린 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은 아직 햇볕에 달구어 지지 않은 탓인지 조금은 눅눅한 기운이었다.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부드럽게 발바닥 아래에서 움직였다. 밟는 자국대로 패여 작은 길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휑한가 했더니 바다에는 줄이 쳐져 있었다. 풍랑 때문인지 해수욕장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개방되어 있었고, 쳐놓은 줄과 줄 사이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안전 요원 중 몇몇은 구조 보드를 들쳐매고 물 속에 있었다. 파도가 들쭉날쭉하게 칠 때마다 안전 요원은 빨간 구조 보드와 함께 두둥실 떠오르고 가라앉길 반복했다. 일반 사람들은 구명 조끼를 입어야 들어갈 수 있어서 바다 안의 사각형에는 구명 조끼를 입은 열댓명의 인원이 약하게 내리는 물줄기를 맞으며 떠있었다. 40분마다 한 번씩 바다에 들어가는 구조 요원을 교체해야 돼서 그나마 저 작은 사각형에 비좁게 들어가 있는 사람들마저 바다 밖으로 나와서 십여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치지 않는 비와 이런저런 제약이 걸려 있는 해수욕장의 상황까지 겹쳐버리니 바다에 뛰어들어야겠다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빗줄기는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 정도 날씨가 되니 사람들도 한둘씩 바다를 빠져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길 잃은 떠돌이 물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이야 한 가득이었지만 상황이 도와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거여서 철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챙겨왔던 짐을 다시 어깨에 짊어지고 차로 돌아왔다. 해수욕을 마치고 가려고 했던 까페를 먼저 가기로 했다. 거기 있다가 다시 해가 뜨면 다시 해수욕장으로 돌아오든가, 아니면 거기서 다른 계획을 짜서 움직이든가. 비가 오다보니 다들 생각은 비슷해선지 커피를 즐길 시간이 아닌데도 까페는 잠깐 피신할 곳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커피 두 잔과 달달한 먹거리 두 접시를 시켰다. 까페 정원에는 초록잎 식물이 무성하게 자랐고, 나는 싱그러운 풀잎만 봐도 눈 앞이 환해지는 것 같아 무더운 날씨에 바다 수영을 하지 못한 게 영 아까웠어도 친구랑 마주보고 여름날 초록 비 맞는 것도 내게는 나름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우린 바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해수 온천을 가기로 했다. 해수욕이든 온천이든 물에 몸 담그는 건 같다. 해수욕을 못한다는 것에 꽤나 실망한 것 같은 동탄산양은 모르겠지만 개봉물개는 새로운 계획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망상 해수욕장 가는 길에 보양온천호텔이라고 궁서체로 큼직하게 적혀져 있는 간판을 단 건물을 보았다. 온천 호텔의 모양새가 우리나라의 기와집도, 어느 더운 나라의 전통 수상 가옥의 모양도 아닌 것이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이 먼저였다. 또, 친구의 지인 분이 동해에 가족 여행을 왔을 때 그 곳에서 묵었다고 해서 그런 곳이 있구나 하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해수욕장을 빠져 나오는 길에 온천 호텔이 바로 앞에 있었다는 걸 보고 시간이 나면 들려도 좋겠다는 얘기를 한 뒤였다. 커피와 다과를 즐기고 나서도 걷히지 않는 구름을 보고 우린 애매한 시간에 해수욕장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온천 호텔에 가기로 결정했다.
보양 온천호텔은 그 시절 수학 여행 목적지로 갈 법한 곳이었다.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호텔 건축 양식이나 내부 장식은 어딘가 느끼하면서도 담백한 감이 있었다. 휘황찬란함 속에 은은한 소박함을 담고 있달까,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옅게 배여 있는 따듯함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희한한 곳이었다. 우린 투숙객이 아니었지만 바로 목욕을 할 수 있는 대욕장으로 가서 입장권을 끊었다. 시원하고도 개운한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목욕을 먼저 마친 친구는 카운터에서 오미자 차까지 한 팩 마셔서 한껏 멀끔해진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들어가는 길에 카운터 옆 냉장고에 들어 있던 오미자 차를 나오는 길에 꼭 한 사발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갈 시간을 맞추어야 해서 부랴부랴 나온 게 통탄스러웠다.
“기다리면서 들은 게 있어.”
친구가 은밀하게 전했다. 온천을 마친 두 가족이 그 다음에 향하는 식당 이름을 우연찮게 듣게 되어 저녁으로 거길 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찜도 시키고, 구이도 시키면 너무 많은가요?”
“다 먹게 됩니다.”
사장님의 장담에 우린 거기 있는 메뉴를 다이소 매장에서 문구용품 쓸어담듯이 시켰다. 배고플 때기도 하고, 홀쭉해진 위장이 뜨끈한 밥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듯 했지만 이걸 다 시키면 다 먹을 수나 있을까 싶었다. 친구는 홀쭉이 주제에 음식지론은 나름 확고해서 꼭 밥 때가 되면 세상신중해지고 만다. 동해까지 왔는데다가 여행지에서 한 번 걸음하는 식당을 두 번 찾아오기란 쉽지 않으니 먹고 싶은 마음이 가는 음식을 다 시키는건 어찌보면 합당한 의견이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서 먹다보면 하늘도 감동해 위장의 여유 공간을 더 넓혀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식사에 임했다. 정말 맛있었다. 아직도 이따금씩 생각나는 맛이다.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다녀서 그런가, 뜨듯한 온천과 더 뜨끈한 사우나에 몸을 말리고 적시고 땀 빼서 그런가. 뭐가 됐든 최고로 굶주린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먹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최고의 만찬을 즐기니 더없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계획대로 수영을 할 수 없었음에, 짖궃은 날씨 때문에 쨍한 하늘을 많이 볼 수 없었음에도 난 아주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행복해, 아주 행복해, 정말 행복해, 하고 생각했다. 원래 행복이란 게 별스러운게 아니라 그저 생선구이 속에서 바삭바삭하게 담겨 있고, 생선 찜 틈에서 눅진눅진하게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인가 싶었다. 다음 날은 동해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여러모로 소중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