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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Aug 15. 2024

[동해]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 있어

열음방학 03 8월5일-8일

친구랑 동해를 가게 됐다. 여름에는 바다지, 무조건 바다 수영이지, 근데 계곡도 좋아, 계곡은 안 가봤는데, 진짜 좋아, 거기 유명한 절도 있는데, 어딘데, 거기 나물 정식이 뭔 이름도 모를 나물을 몇 십 개를, 아 배고프다, 쑥덕쑥덕하다가 여름 방학 휴가지는 동해로 낙점하였다. 애초에 여름휴가철에 맞물리게끔 2박 3일 여행을 계획하긴 했지만 8월 초입이어서 아무래도 가족 단위로 많이들 오겠다 싶었다. 자고로 여름방학자는 극성수기에만 여행을 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사람 바글바글한 틈바구니에서 여름휴가를 만끽하는 것도 여름의 맛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여행 날짜가 다가올 무렵 나는 이미 극도로 신나 있었다.


8월 5일 월요일

날씨는 맑고 화창하다. 운전자인 친구가 강원도까지 가는 길이 한참이니 이른 오전에 만나야 한다고 해 꼭두새벽부터 기상하여 다소 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는 길 출출한 배를 채워줄 주전부리 간식을 빼먹지 않고 가져왔다. 신 트롤리젤리, 초콜릿 몇 개랑 피넛버터초코칩 쿠키. 친구가 휴게소 가서 아침 먹어야 되니까 (몸에 해롭고 득 될 거 하나 없는) 과자는 조금만 먹으라고 했지만 피넛버터초코칩 쿠키가 생각보다 너무 맛있는 바람에 손을 떼기가 힘들었다. 휴게소에 도착해 나는 돈가스 친구는 찌개 정식을 먹었다. 자주 느끼는 건데 내가 먹고 싶어서 시킨 건데 어째 친구가 시키는 게 매번 조금 더 맛있다.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다.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 땡기려는데 친구가 또 말렸다.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온다나 뭐라나. 그래도 옆에서 열심히 운전하는데 또 어떻게 눈 감고 드르렁쿨쿨 잠을 자겠냐고요. 그래서 친구가 시킨 커피 쪼르륵 몇 모금 뺏어 마시는 걸로 합의를 보고 열심히 달렸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는 월정사였다.

월정사는 오대산자락에 자리한 사찰이다. 나는 처음 가보는 곳인데 친구가 말하길 엄청 유명한 사찰이어서 사람들이 많이들 오는 곳이라고 한다. 월정사 입구에 들어가 사천왕께 서울 개봉물개가 왔습니다 인사드리고 절을 둘러보았다. 보통 사찰에는 대웅전을 주불전으로 삼아 불상을 모시는데 월정사는 적광전에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비로자나불을 모신다고 한다. 절을 갈 때마다 부모님이 가자는 곳만 어영부영 들어가서 절을 드리는 나로서는 무슨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표지판에도 그렇게 적혀 있는 걸 보니 통상적인 사찰하고는 뭔가 다른 모양이다.


불전 벽면에 그려진 벽화도 구경하고, 호기심 많은 기독교인 친구 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뚝뚝 떨어지던 빗줄기는 그칠기미 없이 점점 더 굵어지기만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불교 용품점은 필수로 들려야 한다는 내 주장으로 불교 굿즈 살펴보고 팔찌도 여러 개 껴보면서 쇼핑을 하고 상점을 나서는 길에도 비는 여전했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카페로 피신했다.


쏴아아, 비가 와요,라고 적혀있는 2학년 국어 교과서 수록된 글의 지문이 떠올랐다. 쏴아아,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비가 수많은 선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친구가 밖에 나가보자고 해서 바깥에 가보니 처마 밑에 사람들이 쭈르륵 둘러앉아 비를 피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바깥 테이블에 우산도 우비도 쓰지 않은 채 맨 몸으로 비를 맞으며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단한 불심인 건가, 평온해 보이는 그 모습이 참 어이없으면서도 멋져 보였다.

우리도 테이블 한 대를 공수해 와서 앉았다. 의자 위 물기를 손으로 탈탈 털고 앉았는데 테이블 위며 바닥이며 이미 흥건하게 젖기 시작하다 못해 작고 큰 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어 조금 젖는 게 대수겠냐 싶은 상태에 이르렀다. 바지도 돌돌 말고 양말도 벗어서 운동화 안에 넣었다. 물론 운동화마저 이미 젖어서 흐물 해진 지 오래다. 이제와 마른 걸 찾는 건 늦었다. 주문한 연잎 차를 쪼르륵 따라 마셨다. 비가 와 서늘한 공기와 여기저기 튀는 빗방울로 맨 팔다리는 축축해지고 있는데 따뜻한 연잎 찻물이 몸으로 들어가니 가슴 한가운데부터 뜨끈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테이블 반틈 너머로 조금만 손을 내밀어도 가열하게 내리는 비를 맞을 수 있었다. 찻잔을 들어 조금씩 바깥으로 밀었다. 입구가 둥글고 작은 찻잔이 머금은 연잎 차 위로 빗방울이 퐁퐁 떨어졌다. 흔들리던 연잎 차 수면에 작게 파열이 일어나면서 빗방울이 섞여 들어갔다. 연잎차 빗물 리미티드 에디션, 여름 한정으로 맛볼 수 있는 연잎차여서 그런지 더 달달하고 뜨끈하게 몸을 달구어 주었다. 친구 옆에서 기대 눈을 감았다. 떨어지는 빗소리는 눈을 감고 들으면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쌀 포대 안에서 쌀알이 굴러 다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따금씩 팔이나 맨다리 위로 또르륵 굴러가는 물방울의 차가운 감촉으로 이건 비구나, 싶었다. 눈 감고 있다가 뜨면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고, 다시 감았다 한참 있다가 떴는데도 비가 내려서 내가 살풋 잠을 잔 건지, 내내 빗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잠깐 얕은 파도가 치는 바다에 다녀온 건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카페에서 장대비의 기세가 꺾이길 한참 기다리고 나오니 어느새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 우산을 꺼내 쓰고 사찰 밖으로 나와 숲길 산책로로 들어섰을 때는 비가 멎어 있었다. 비는 축축하게 젖은 흙과 줄기마다 맺혀 있는 물방울로 비가 왔음을 짐작할 흔적만 남기고 떠났다. 산책할 쯤에 비가 그쳐서 다행이었다. 우산을 푹 눌러쓰거나 빗줄기에 가렸다면 보지 못했을 법한 풍경을 시야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오히려 좋았던 건 비가 온 후여서 더 싱그러워진 식물과 더 짙어진 녹빛을 볼 수 있었다는 거다. 산책 길에 벼락을 맞은 나무 밑동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벼락을 맞아 생을 다했더라도 몇 백 년을 살아선지 밑동은 치워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은 속이 텅 비어 있는 그 나무도 쓰러지기 전에는 튼튼한 고목이었을 것이다. 아마 아주 오랜 옛적에는 젊고 푸르른 나무였을 거고, 그전에는 푸릇푸릇한 새싹이었을 테며, 그보다 전에는 작고 영근 씨앗이었겠지. 그 생각을 하니 나랑 친구가 가는 길목에 놓인 그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 껍데기가 대견했다. 이미 생명을 다해 갈색의 껍데기만 남은 그 모습에서조차 나는 남아 있는 생명력을 느꼈다. 내 여태까지의 생을 몇 십 번 살고 간 그 늙은 나무는 무엇을 남긴 것이고, 나는 그에 비해 짧게 남았을 이 땅에서의 삶에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런 데에서는 유명한 데가 꼭 맛있는 곳이라는 법은 없어, 친구의 신조는 이러했다. 이렇게 관광객이나 여행객들이 많은 곳에서는 반드시 후기가 많거나 유명세가 있다고 맛있는 밥집은 아니라는 거다. 차라리 느낌이 좋은 데를 가서 먹으면 성공한다는데, 난 대체 그 느낌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친구의 촉을 따라가서 실패한 적도 없고 실패에 가까워져 본 적도 없어서 나는 여태 그랬듯 친구의 촉을 따르기로 했다. 산나물 정식 집이어서 오대산 기슭에서 채취한 나물로 만든 한상 차림이었다. 식탁 위에 나물이 어떻게 배치될 건지 차림표가 올려져 있었다. 순서대로 이런 나물이 차려질 것입니다, 하는 예고판이었다. 비슷한 모양새와 색채를 띠고서도 나물의 맛은 제각기 달랐다. 어떤 건 조금 더 고소하고, 그 옆의 나물은 까실한 촉감이고, 그 아래 건 짭짤했다. 밥을 많이 먹으면 배가 빨리 찰까 봐 천천히 나물 한 입, 밥 몇 톨을 세가며 번갈아 먹었다. 친구는 어릴 적부터 산을 다녔다고 했다. 특히 아버지께서 산을 좋아하셔서 자주 같이 다녔단다. 그래서 산을 다 타고 내려오면 나물 반찬이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과 막걸리를 드시고는 했다고 한다. 친구는 나물 반찬을 보고 한참 동안 아버지를 떠올렸다. 위로에 서툰 나는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하는 친구를 잘 달래줄 수 없어 미안했다. 나는 오늘 비를 흠씬 맞고, 수백 년 된 나무의 남겨진 흔적을 보았다. 처음으로 이렇게 가짓수가 많은 나물 반찬 정식을 배가 터지게 먹었다. 그러니 아마 나는 앞으로 산 아래 식당에서 나물 반찬을 먹을 때면 이 친구를 떠올리게 될 거다.

숙소는 한섬 해수욕장 앞 에어비엔비를 잡았다. 걸어서 10분 내 거리에 해수욕장이 있어 해수욕하고 나와서 씻기도 편하고 날씨가 허락한다면 자주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녁 시간에 도착해 밖으로 나와 한섬 해수욕장으로 걸어 나가서야 계획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수욕장 진입로 바로 옆에 생활 폐수가 그대로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게 폐수인지도 모르고 해수욕장이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에 잔뜩 감격에 겨워 있었으나 친구는 그걸 알아차리자마자 여긴 글렀다 싶었나 보다. 가까운 거리에 조금 더 큰 망상 해수욕장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면 되겠다 생각을 하면서 한섬 해수욕장 근처 나있는 산책 길만 가볍게 걷고 돌아가자고 했다.


한섬 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작고 좁은 해수욕장이다. 그래도 그만큼 한적해서 혼자 두둥실 떠내려가면서 놀면 재밌는 곳이겠다 싶었다. 난 되는대로 살아가는 주의라서 친구가 폐수 흐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혼자 오염된 물을 마시면서 즐겁게 해수욕을, 그럼 폐수욕이 되는 건가, 했을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마치 원효대사 해골물과 같아 알기 전까지는 모든 걸 모르는 법이니 말이다, 허허. 선조 말씀은 틀린 게 없다는데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고 모르는 게 약이라기도 하니까 아무래도 오래전부터 결론이 안 나는 논제인가 보다. 그래도 친구처럼 딱 잘라 결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가는 게 낫다. 난 뭐, 이러나저러나 바닷물에만 동동 떠있으면 좋으니까 말이다.


우린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근처 큰 마트에서 장을 봤다. 내일 아침 먹을거리, 과일하고 간식거리. 장 보러 가는 길에는 이미 해가 저물어 남은 볕으로 길가만 옅은 붉은색이었다. 나는 친구랑 여름 방학을 시작하는 초등학생이 된 것만 같았다. 오래간만에 시골에 내려와 동네 친구랑 놀고, 아쉽게도 헤어져야 하는 시간인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따뜻한 흰쌀밥과 김이 폴폴 나는 된장찌개가 뚝배기에 담겨 있지 않을까 싶었다. 큰 나무에 매달려 있을 매미들이 맴맴, 맴매앰, 찌르르하고 요란하게도 울어댔다. 너무 덥지도 끈적하지도 않은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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