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음방학 05 8월 5일-8일
동해까지 왔는데 바다에 몸도 못 적시고 뭍으로 돌아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전날 기상 악화로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으나 오늘은 바다가 빗물로 넘치는 일이 있어도 꼭 바다 수영은 해야겠다는 전투적인 마음이 들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숙소에서 체크 아웃하는 길 곧장 망상 해수욕장으로 나왔다. 오전 일찍 나와선지 아직까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음이었다. 이전 날에도 비는 공식처럼 정오를 지나 오후가 될 무렵부터 하늘이 흐려지더니 빗물이 뿌려지고는 했는데 오늘도 비가 오더라도 아직 오려면 시간이 한참 남은 셈이었다. 혹시 친구가 구름의 움직임과 하늘의 변화까지 다 계산해서 빨리 나가자고 재촉한 걸까. 설마 싶긴 하다가도 평소 보아온 친구의 철두철미한 성미를 미루어보건대 각고의 계산 끝에 나온 결과값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게 아니더라도 친구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 지난 3일 동안은 몸도 마음도 참 편했다. 사실 계획을 세우는 게 딱히 강점이 아닌 나로서는 옆에 무계획자가 있든 계획성애자가 있든 큰 상관은 없다. 각 유형마다 장점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나 활동을 할 때 동행자의 성향에 발을 맞춘다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마찬가지로 계획성이 없는 친구라면 늘 하던 대로 설렁설렁 다니면서 동네 마실 다니면 시간은 금방 간다. 대신 어느 정도 활동량이 떨어지고, 이동 반경이 좁아지는 것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 그것마저도 나는 함께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어떤 걸 경험하는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짜인 계획대로 움직이거나 하루 일정에 어느 정도의 구조가 필요한 사람과 함께한다면 보람찬 여행을 꾸려나갈 수 있어 좋다. 조금 바빠지기는 하더라도 보고 듣는 것도 많아지고, 알짜배기 경험이 쌓이면서 하루가 72시간인듯한 기이한 시간 감각마저 발달하게 된다. 내가 홀몸으로 떠난다면야 뭐든 내 마음대로 하겠지만 같이 여행한다는 건 함께 조율해 나가는 맛이니까 누구랑 여행을 가는지 파악하는 게 제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나는 친구랑 더 가까워지고 싶고,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동해까지 이르렀으니 그만큼 친구 곁에 열심히 붙어 다니는 게 중요했다. 충실히 붙어 다닌 덕분에 나는 이미 동해에서 보낸 시간만으로도 여행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전날 비가 내려 해수욕을 못했다는 사실에 나보다 더 실망을 한 것 같았다. 나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사실 바다야 매해 가는 거고 당장 그 전주만 해도 난 이미 고등학교 친구들과 대천을 다녀왔으니 바다에 대한 간절함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 동해에서의 마지막 날인 이 날만큼은 바다에 창창한 햇살만 드리워지길 바랐다. 살갗에 닿는 뜨끈한 햇볕을 느꼈을 때 다행스러움을 느낀 건 아마 그런 간절한 마음이 들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구명조끼와 튜브를 빌리고 옷가지나 짐을 놓을 자리도 빌렸다. 바닷물은 생각보다 차가워 발이 닿자마자 머리끝까지 찬기가 타고 올라왔다. 친구는 풍덩 빠져야지 몸이 빨리 풀린다고 바다에 몸을 내던졌다. 객기 부리는 모양새가 꼭 은퇴한 노부부가 키우는 늠름한 스탠다드 푸들 같았다. 친구는 키도 크고 머리도 반곱슬이라서 구불구불거려서 멀찍이서 보면 스탠다드 푸들과 그렇게나 닮아 보인다. 그렇다고 몇 번 말해줬을 때 완강히 거부하며 본인은 포메라니안이나 말티즈처럼 깜찍한 강아지로 불리길 원하던데 그건 과욕이라고 일러주고 싶다. 한 번 스탠다드 푸들은 영원한 스탠다드 푸들이다.
바다는 역시 꿀잼이다. 넘실넘실 파도를 타다가 휘몰아치는 파도 결에 몸을 맡겨 뒹굴거리기도 하고, 갈라지거나 부서지는 파도 자락에 온몸을 맞을 때 느껴지는 통쾌함은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이다. 해변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시작이자 끝자락이다. 대양과 대륙의 크기를 따져보았을 때, 손톱 옆에 툭 튀어나온 거스러미만도 못한 해변의 크기에서 옹기종기 모여 복작거리며 노는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귀여운가. 와중에 더 재밌게 놀아보겠다고 온갖 모양의 튜브를 끼고 놀고, 소꿉놀이 도구를 챙겨 오질 않나, 물놀이하면 배 빨리 꺼진다고 먹을거리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것까지 누가 보면 인간들 아주 가지가지한다고 할 거다.
나는 개봉 출신 물개로서 물을 그렇게나 좋아하지만 바다는 조금 무섭다. 수영장은 일정한 규격에 깊이까지 가늠해 볼 수 있지만 바다나 계곡은 불확실성이 강하다. 특히 바다는 끝이 없어 보인다. 결국 다른 대양과 만나 다시 이어지고, 바닷물은 돌고 돌아 시작점으로 돌아올 수도 있으니 바다에 끝이 없다는 건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지론은 모든 자연은 무서워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인간 주제에 자연을 얕본다는 건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고, 자연이 내놓은 산물을 그저 놀잇감을 여기는 건 안일한 마음가짐이다. 늘 조심해야 하고, 자연이 한편을 내준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친구랑 한참을 정신없이 놀았다. 친구는 무려 몇 년 만에 처음 바다에서 물놀이를 해본다고 했다. 매 여름 몇 번씩 바다를 찾는 나로서는 굉장하게 보였다. 한 여름무더위 속에서 대체 바다를 안 가면 어딜 간단 말이지. 친구는 수영을 못한다는데 바다에서는 거침없었다. 보니까 혼자서 빨빨거리면서 잘만 돌아다니던데 어떤 수영을 어떻게 못한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수영을 할 줄 아는데도 발이 바닥에 안 닿으면 꼴 사납게 퍼덕거리면서 다시 얕은 물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역시 신체 능력치를 키우려면 겁대가리가 없어야 하나보다. 친구한테 업혀서 헤엄치고, 튜브 위에 누우면 친구가 빙글빙글 돌려주기도 하고 튜브 타고 파도 넘기도 하다가 수경 끼고 바닥으로 들어가 물고기 가족이 떼 지어 헤엄치는 것도 구경했다. 바다에서는 할 게 너무 많았다.
종종 해파리가 나오기도 했다. 안 그래도 동해 가기 전에 날씨가 지나치게 따뜻해져 노무라입깃 해파리 떼가 동해 연안에 출몰해 관광객들이 다치거나 부상을 입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그래서 혹시나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해파리가 진짜로 출몰했다. 그럴 때마다 안전 요원이 삽과 뜰채를 들고 비장하게 출동해 해파리를 건져 냈다. 친구랑 나는 아기 해파리를 가까이서 봤는데 겁도 없는 친구는 더 자세히 보고 싶다고 물속에서 해파리를 요목조목 살펴보았다. 겁이 많은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보았는데 해파리의 움직임에 깃든 자기 의지는 0에 가까워 보였다. 물결에 몸을 맡기고 물길이 데려가는 대로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생에는 해파리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해파리가 나오는 족족 인간이 삽으로 깡깡 내리치는데 어떻게 계속 밀려오는 거지.“
“쟤가 이제 살아서 돌아가면 소문내겠지.“
“해파리 마을에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는데 알고 보니까 동해로 가는 애들마다 목숨을 잃는 거야.”
“얘들아, 동해로 가면 안 돼, 인간이 우릴 모조리 죽이려고 해. 마을에서 자기들끼리 회의하겠지. “
친구랑 나는 놀다 보니 종아리가 따끔따끔했는데 아무래도 떠다니던 해파리 촉수에 걸린 것 같았다. 해파리 마을 이장이 동해 망상 해수욕장의 상황을 안다면 주민이 더 이상 동해로 흘러오지 않도록 단속을 조금 더 할 텐데 말이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물이 바다에 퐁퐁 떨어지니까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부서지는 수면 위로 더 작은 파열이 생겨났다. 빗방울은 점차 굵어져 빗줄기가 되었고, 우린 물놀이는 이쯤 하자 싶어서 짐을 챙기러 나갔다. 파라솔 아래 맡은 자리에 다다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장대비는 더 거세게 내리쳤다. 그렇게 많은 비가 한꺼번에 내리는 건 정말 오랜만에 봤다. 우린 그 비를 맨 몸으로 맞으며 짐을 챙겼다. 비가 올 적에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다면 우산이나 장화로 어떻게든 비를 덜 맞으려고 애쓰는데 해수욕장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이미 다 젖은 채로 비까지 맞고 있자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딱히 피할 이유도 없었다. 큼지막한 빗방울이 너무 세차게 내리니 얼굴을 때리면 아프다는 게 아니면 그렇게 무작정 비를 맞고 있는 것도 꽤 재밌었다. 친구랑 나는 호들갑을 떨면서 해수욕장을 나섰다. 친구의 구불구불한 머리칼 끝으로도, 내 턱 끝과 콧잔등으로도 빗방울이 끊임없이 타고 흘렀다.
샤워장에서 박박 씻고 나오니까 언제 하늘에 구멍 난 듯 퍼부었는지 감쪽같을 정도로 비가 가늘어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 속에서 점심거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해변 식당가 중 눈에 띄는 곳으로 들어가 장칼국수와 코다리 냉면을 시켰다. 안 그래도 칼국수는 나의 최애 메뉴 중 하나인 데다 물놀이 직후의 출출함, 비 내리는 날 맛보는 뜨끈뜨끈함으로 칼국수와 냉면의 조합은 날 더없이 기쁘게 해 주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할 쯤에는 비가 다 그칠 때였는데 나는 이대로 동해를 떠나기 너무 아쉽다고 생각했다. 여행 전에 우리가 얘기한 장소를 다 가본 것도 아니거니와 놀다 보니 2박 3일은 턱없이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왕 다음 날까지 연차 낸 김에 하루 더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하여 우린 그 전날 뜨끈하게 몸을 지졌던 보양 온천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온천 호텔은 지붕의 모양이나 건물에 칠해진 색의 조합 때문인지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욕장처럼 보였다. 망상 해수욕장에서 보양 온천 호텔로 가는 길에는 바다 열차가 지나가는 기찻길이 깔려 있다. 기차가 지나갈 때는 차단 봉이 내려가 기다려야 하고, 차단 봉이 올라가면 사람과 차가 지나갈 수 있다. 기찻길에는 바닷물이 얕게 깔려 마치 가오나시와 치히로가 탔던 바다 열차도 눈앞에서 지나갈 것만 같았다. 해수욕장과 보양 온천 호텔을 이어주는 육교를 건널 때는 치히로처럼 숨을 참고 건너야 할 것 같았다. 평소 망상을 숨 쉬듯 해서 그런 걸까, 망상 해수욕장은 내 성미에 딱 맞는 해변가였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의 해변은 차분했다. 휴가철인데도 불구하고 한적했는 데다가 해까지 저물어가자 주변은 조용함에 더 가라앉았다.
“성수기라서 사람들이 엄청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너무 휑하다. 옛날에는 밤에도 해변가에는 사람들 모여서 불꽃놀이도 하고 공 차고 그랬는데, 요새는 안 그런가?“
“난 한가해서 좋은데.”
“북적거려야지 놀러 온 기분도 나지 않아?”
”서울이 매일 북적거리니까 오히려 한적한 데로 오니까 더 여름휴가 같아.”
해변으로 넘어가는 육교 위에 서 있으니 고만고만한 높이의 건물 몇 채와 그보다 더 길쭉하게 자란 가로수가 내려다 보였다. 어둑한 하늘에는 도로 가의 불빛 때문에 별은 도통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별 대신 반짝거리며 자리를 옮기는 점이 있었다. 밤하늘에 유달리 밝게 빛나는 건 인공위성이라고 전에 아빠가 말해준 적이 있어서 인공위성이 궤도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구나, 생각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해변가였다. 풀숲에선 매미가 찌르르 울어 댔다. 그 너머로는 바닷물이 밀려들고 쓸려 나가며 철썩이는 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파도치는 소리인지, 하루종일 귀에 담고 있어 아직도 귓바퀴를 타고 도는 메아리인지는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