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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Sep 03. 2024

척척박사는 모든 걸 척척 해낼 수 있나요

척척박사의 실험실 01

박사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되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박사 수련생, 박사 연습생, 박사 체험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박사 과정을 진학할까 생각한 건 작년 겨울이었다.


작년의 나는 많이 바빴다. 교사 의존도가 높은 학생이 몇몇 있었는데 한 명을 챙기자니 다른 한 명을 그냥 둘 수는 없었고, 그러자니 모두를 일일이 다 챙기면 안 될 것만 같아 매일이 동분서주였다. 가르침을 잘 받아준 학생들에게 고마웠고, 열린 마음으로 교실을 수용해 주시는 학부모님들께도 감사한 한 해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자주 아팠다. 성대 결절이 찾아와 반년 넘게 치료를 받았고, 그 와중에도 월별로 이름을 달리하는 각종 염증성 질환을 달고 살았다. 홍반이 팔다리를 덮어 가려움에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잤다. 염증 수치가 높아질 때면 열이 오르고 떨어지길 반복해 병원 문을 수시로 드나들며 코로나 검사와 독감 검사를 받았다. 방 안에는 이 병원 저 병원에서 타온 약봉지가 굴러다니고, 매번 어떤 약을 언제 챙겨 먹어야 되는지 기억하는 것도 나중에는 대수롭지 않아 아무거나 집어 탈탈 털어먹고는 했다. 약사라도 된 것처럼 집에 있는 약을 조제해 먹었다. 결국 몸이 어느 정도 불편하고 아픈 상태가 본래의 상태가 되어버려 나중에는 아픈 걸 챙기는 것조차 귀찮음이 되어 버렸다.


37도와 38도 사이에서 축 쳐져 있던 어떤 날이 있었다. 내가 학생이었다면 우리 엄마는 다음 날 결석하게 해 줬을 텐데, 서러움이 치밀었다. 그다음 날은 학년 행사로 반 별로 가게 놀이를 하는 날이었다. 미룰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활동이 계획되어 있으니 내가 아프다고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의사들이 말했다. 이 목 상태에서는 말을 하면 안 돼요. 그렇지만 교실에서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나요. 흔한 스트레스성이니까 스트레스 덜 받아야 돼요. 애들 보면 스트레스 받는걸요. 식사 시간 길게 잡고 먹어야 돼요. 급식은 마시는 게 국룰 아닌가요. 날 아프게 하는 건 필시 교실이다 확신이 들 지경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음 날 교실로 향했다. 애들은 집에서 있는 물건, 없는 물건 다 가져와 장터를 꾸렸다. 선생님, 다음에 또 해요, 너무 재밌어요, 하는 말에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그 순간만큼은 애들이 보약처럼 느껴졌다.


그게 문제였다. 날 먼저 챙기고, 그다음에 교실을 챙겨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그게 내 최선을 쏟아부은 결과라면 거기에 이만 만족했어야 맞다. 학생을 더 챙기고, 교실을 더 알뜰하게 꾸려나가고 싶었다면 내게 그 모든 걸 해내고도 거뜬할 능력이 있었어야 했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한 것마저 교사에게는 큰 자산이니 말이다. 교사로서 역량이 부족한 것을 어떻게든 메꾸고자 지나치게 바빴고, 이상적인 교실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휩싸여 스스로를 모질게 다그쳤다. 이 정도면 잘한 거다, 이쯤 하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완성된 교실이다,라는 인정을 끝끝내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아끼는 교사, 학부모와 신뢰 관계가 돈독한 교사, 사랑이 넘치는 교실 같은 허울 좋은 말이 어울리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었고, 그런 교실을 만들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잔뜩 불어버린 욕심과는 반대로 그걸 이루어 내고자 하는 내 모습은 늘 골골대는, 신경질 내는, 업무 처리도 뒤죽박죽인 사람으로밖에 안 비추어졌다. 하얀 도화지 같은 아이들과 비어있는 교실을 풍성하게 채워 나가는 것이야말로 교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인데 나는 돌이켜보건대 화려하게 치장된 교실 속에서 정작 나는 점점 비워져 가고 있었다.


작년 여름은 유달리도 힘들었다. 서이초 선생님께서 떠나신 다음 날에도 교실에서의 시간은 잘만 갔다. 교사 커뮤니티에는 분마다 초마다 새로운 글과 댓글이 올라왔다. 선생님들은 다들 각자의 교실에서 많이들 가슴 졸이고, 아파하고 계셨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자기만의 교실 아닌가. 내 슬픔과 울적함이 몸집을 불려 사각형의 교실을 모조리 차지해 버리면 어떡하지, 그 안에서 내 숨통마저 끊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8시 10분, 난 언제나 그 시간에 교실에 도착한다. 그때부터 8시 40분까지 수업을 준비하고, 그 후부터 하나둘씩 들어오는 아이들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날 아침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8시 10분이었다. 너무나도 다른 8시 10분이기도 했다.

“에구, 쌤, 서이초 일 생각해? 조금만 더 힘내자, 응? “

옆반 선생님이 잠깐 뭘 빌리러 교실 뒷문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혼자 책상에 머리 박고 질질 짜는 걸 보고 정답게 달래주셨다. 어제의 8시 10분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날의 8시 10분이 그렇게 흘러갔다.


여름날, 몇 분의 선생님을 연달아 떠내 보내고 몇 차례의 시위를 나가면서 몇 천 개의 검은 점 속에서 하나의 점이 되어 이어진 몇 달의 시간 동안에도 드리워진 먹구름은 도통 흩어지질 않았다. 왁자지껄하고 시끌시끌한 교실 속에서 피어난 차가운 적막은 오로지 내 마음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그렇게 내게 교실은 서서히 지나치게 외롭고 삭막한 곳이 되어버렸다.


가을을 지나 겨울의 초입으로 향할 무렵, 동학년 선생님들과 모이는 식사 자리를 가졌다. 2반 선생님은 내가 2년 차 때 학년 부장을 하셨고, 퇴직 후 기간제로 돌아오시면서 한 해를 동학년으로 더 보내게 되었다.

“혜린이는 나중에 하고 싶은 거 있어?“

“글쎄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흐흐.”

“그래도 석사도 다녀왔는데 더 공부할 생각은 없고?”

“공부는 제 취향이 아닌가 봐요. 공부 너무 재미없더라고요. 노는 건 재밌었지만요. “

“그럼 공부하지 말고 더 놀다 오지 그래. 재밌는 거 하면서 살아야지.”

”박사는 만만치가 않아 보여서요. 석사야 어중이떠중이로 어떻게 마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봐. 마음먹으면 못할 게 뭐가 있겠어. 공부 더 하고 오면 열리는 길이 더 많아질 거야. 젊은 사람이 교실에만 앞으로 몇 십 년 더 있을 필요는 없는 거거든.”

열리는 길이 더 많아 질까, 내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교실 말고 다른 곳에서 있을 수도 있을까. 그런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했다.


1월 말, 아이들과 헤어지며 나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슬펐다. 아이들은 올망졸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 누구 하나 정이 안 붙은 아이가 없어서 헤어지기 싫었고,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알아서 훌륭하게 자란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러면서도 더 아껴줘야 했고, 더 챙겼어야 했고, 더 너그러웠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널뛰는 감정 속에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졸업하는 6학년 학생이면 몰라도 아직까지도 내 허리춤 밖에 안 오는 애들을 보면서도 뭐가 그렇게 복잡다단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얘들아, 너네 때문에 선생님이 고생깨나 했다, 그래도 너네 덕분에 선생님은 정말 행복했다, 너무 사랑한다, 알지, 대충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아이들을 보내고 교실 정리를 하면서 생각했다, 이제는 너무 지쳤다고.


박사 과정을 진학하기 위해서 아이엘츠 점수를 다시 내야 했다. 시험을 다 치르고 나니 저녁 6시가 훌쩍 넘긴 시간이 되었다. 건물에 들어갈 때는 그저 흐린 겨울날이었는데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온통 하얗게 덮인 눈밭이었다. 시험 점수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에는 대학원 원서를 써내야 한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연구 계획서 같은 것들을 준비해야 하고, 대학 기관 중 어느 한 곳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길 바라며 여기저기 기웃거려야 한다. 잘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이대로 준비해 보는 게 맞는 게 확신이 안 선다, 어떤 이유로 대학원 진학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는 게 없네, 모르는 것 밖에 없네, 이게, 맞나? 온점도 느낌표도 없이 오로지 물음표 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눈발은 점점 더 두텁게 내려앉았다. 그래서 패딩과 목도리를 껴입어도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날씨에도 사근사근 내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묘한 포근함이 일었다. 진짜 모르겠다, 몰라도 되겠지, 되나?, 왜 안돼?, 에이, 춥다, 집에나 가자.

집에 가는 길에도 눈발은 그치지 않았다. 지하철이 한강 다리를 건널 때, 눈발은 마치 이불처럼 한강을 덮을 기세로 내렸다. 눈은 강물에 닿으면 녹을 것이다. 그렇게 형체를 잃고 물이 되어 버릴 거다. 그래도 날이 더 추워지면 얼음 알갱이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날에는 또 다른 모양의 눈이 될 수도 있다. 나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야지 싶었다. 가다 보면 어디론가는 가게 되겠지. 밤이 깊은 시각에도 바깥은 훤해 보였다. 천장에 허옇게 떠 있는 지하철 불빛 때문인지, 창문가에 하얗게 쌓여 있는 눈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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