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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뻘밭에서는 뻘소리 해야 제 맛이다

서해바다

by 이해린

천리포 수목원을 다녀간 다음 날 갯벌 체험을 하기로 했다. 태안 여행을 계획할 당시에는 천리포 수목원은 꼭 가야지,라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태안 주변을 둘러보다 그럼 해식동굴도? 그럼 갯벌 구경도? 결국 물음표를 주렁주렁 달며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래서 갯벌 체험까지 이르렀다. 서해 바다는 가족끼리 노상 여름이면 갔던 대천 해수욕장으로 익숙한 느낌이었다. 서해는 물이 맑고 푸르지는 않다는 둥 바다다운 바다를 보려면 동해를 가야 한다는 둥 여러 말 들이 많지만 우리 서해, 그런 탁한 아이 아닙니다. 서해도 마찬가지로 만조에 맞춰 물이 싹 들어오면 그렇게 풍요로운 바다가 아닐 수 없다. 다만, 갯벌은 나도 처음인지라 육지도 바다도 아닌 갯벌이란 건 대체 뭔지 정말 궁금했다.


이 날이 월요일이었던 것 같다. 차를 몰아 갯벌 체험하는 곳으로 갔는데 휑하기 그지없었다. 12월의 어느 월요일 오후 두 시의 갯벌에서 인파를 기대하기는 과연 어려울 법도 하다만 이렇게나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딸랑 두 명의 육지인만 있을 뿐이니 마치 미생물이 된 것 마냥 작게 느껴졌다. 갯벌 체험장을 운영하시는 사장님께서는 빈 손으로 온 우리가 쓸 만한 장비를 챙겨주셨다. 장갑, 장화, 삽과 양동이, 맛소금통. 맛소금은 조개를 유인하기 위해 뿌려야 된다고 하셨다. 경험치와 관련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한 손에는 삽, 다른 손에는 맛소금통을 쥔 채 저벅저벅 드넓은 뻘로 나가자니 아무래도 조금 뻘쭘하기는 했지만 뭐라도 구경은 할 수 있겠지 희망을 걸어 보았다.


꽤 오래 걸어야 했다. 뭍에서 내다보았을 때는 고개를 조금 들어 내다보면 바다였는데 갯벌을 직접 걸어 보니 물길이 보이는 것조차 한참을 걸어 나간 뒤였다. 뻘은 질척였다. 포켓몬스터에 질뻐기가 된 기분. 장화 밑바닥에 끈끈이가 달라붙은 듯 뻘이 날 붙잡아 다리가 무겁고, 움직임이 둔해졌다. 내리누르는 중력이 더 강해진 것처럼 대지도, 내 몸체도 단단한 땅 위에서보다 한 꼬집씩 더 납작해졌다.

사장님께서 아주머니 한 분이 조개 캐러 나가셨다고 하시더니 꽤 걸어 나가자 쭈그려 앉아 뻘을 공략하고 계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아주머니한테 접근해 조개 공략법을 여쭈었다. 맛소금 뿌리고, 나오면 캐면 된다고. 음, 저희도 그 정도는 압니다만. 더 채근하고 싶었지만 아주머니는 이미 몰입의 상태에 계셨다. 어차피 조개 캐기란 기술의 문제지, 가르침의 영역은 아닌 것이었다. 그 이상 방해하면 아주머니의 원대한 계획에 누를 범할 것 같아 우리는 이만 물러섰다.


맛소금을 무작정 뿌리기로 했다. 물량공세를 먼저 퍼부은 뒤,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소금 따위로 조개들이 고개 들고 나올까 의문이었다. 고작 짭짤한 맛 조금 보자고 목숨 걸고 나오려나. 갖가지 물음표를 달고 기다리고 있는데 소금을 친지 얼마 되지 않아 진흙더미가 움찔움찔한다. 대롱처럼 생긴 게 말랑한 끝을 달고 머리를 드민다. 미안하지만 조금, 징그러운데? 내가 생각한 조개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후에 인터넷에 찾아보니 맛조개라고 했다. 나는 인어공주랑 같이 언더더씨 합창한 조개를 생각했건만 얘네는 그냥 듄에서 나온 모래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린 양동이랑 삽 달랑달랑 들고 다니다 보니 곧이어 맛조개 말고 언더더씨 조개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열심히 캘 수는 있었으나 뭐가 뭔지도 구분이 안 가는 짧은 해양 생물 지식과 잡아서 뭐 하나, 싶었던 뻘밭 매너리즘에 빠르게 의지를 상실하고 곧 다른 곳에 몰두했다. 조개가 소금 따라서 나오다가 곧 뽈뽈뽈 진흙 더미를 덮고 사라져 버리는 걸 목격한 친구가 실험을 설계했다. 조개는 어떻게 움직일까, 얼마나 빨리 이동할 수 있을까, 어떤 조건에 놓인 조개가 가장 빨리 움직일까, 등등의 뻘한 주제를 선정하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얘네가 쫄아서 죽음을 위장하는 건가 싶었는데 눈을 돌리고 다른 데를 보다가 다시 현장을 습격하면 얘네가 분명 어느 정도는 움직인 상태였다. 조개들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여기저기 쑤시고, 파내고, 맛소금 뿌리고, 구경하고, 돌아다니다가 시간이 다 되어가는 듯해서 장비를 챙겨 뭍으로 향했다. 육지와 바다 사이에 놓인 질척이는 중간 지대를 걷는 건 아무리 해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단단한 땅도 출렁이는 물도 아닌 것이 질퍽이고 꿀렁거리면서 드넓게도 펼쳐져 있었다. 해가 저물면 바다 물에 다 잠길 공간이라는 것도 희한했다. 자연이 육지와 바다, 그 사이 갯벌은 그렇게 작동해야 한다고 주문한 공간이라고 해도, 그걸 내가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디뎌서 체험한다고 해도 여전히 신기한 일이었다. 한 걸음씩 뭍으로 가까워질수록 땅이 단단해져 갔다. 그럼에도 갯벌 바닥의 오묘한 끈적임이 묻어 나올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방방에서 한두 시간 뛰며 놀다가 시간이 다 끝나서 밖으로 나올 때, 콘크리트 바닥에 두 발을 대도 발바닥에서 천천히 퍼지는 잔잔한 요동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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