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제주는 봄이고 여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봄과 여름을 사랑한다. 봄과 여름이 주는 싱그러움과 푸릇푸릇함은 나를 매우 들뜨게 만든다. 꽃과 나무. 풀 내음과 파도 소리.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역동적인 사람들의 움직임. 물론 선선한 가을 바람도 좋아하긴 한다. 하지만 겨울을 무서워하는 나에게 가을은 뭐랄까 일종의 알람시계라고나 할까.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며 은근히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겨울이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에게는 겨울이 여전히 내가 제일 아팠던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나는 아직도 혹시나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걱정을 한다. 물론 한 번의 겨울을 아주 멀쩡히 잘 보냈고 또 앞으로도 잘 보내리라는 것도 알지만 가을부터 시작되는 그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기란 참 어렵다.
체력적으로 지쳐있었다. 올해 여름의 뉴스 키워드는 최악의 무더위였고 그 속에서 나는 하루에 여덟 시간씩 여덟 번정도 기자 연결, 캐스터 연결을 해댔고 그런 하루들이 내 일상이 되어갔다. 두피까지 타들어갔고 내 일상이 푹푹 찌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짜증과 화가 많아졌다.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여유를 찾고 싶었다. 뭘 계획할 여유도 없어서 전부터 계속 생각한 하와이나 발리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제주에 갔다.
3일 동안 여유를 찾아돌아 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분명한 건 난 한 번의 브레이크를 걸었다.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걸 보고 느끼고 좋은 사람과 좋은 얘기를 나누고. 그저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나를 보며 그런 걸 온전히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을의 제주는 나에게 참 많은 걸 알려주었다. 철썩이는 여름의 파도 소리는 아니지만 찰랑이는 가을의 파도 소리와 사르륵 거리는 갈대와 진녹색과 갈색의 풀들,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풍차와, 다른 계절의 노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따듯한 가을의 노을, 추적추적 내리는 비, 드문 인적. 가을의 제주는 가을이 내게도 고요하고 평안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가을이 조금은 더 편해졌다. 그렇게 가을의 제주와 사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