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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꾸꾸 Mar 07. 2024

한국,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아닌 관계주의 사회?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 강연을 듣고

한국사람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 거야?
반박하기 어려운 한국인만의 특징이 있을까?

예상과 다른 특이한 것을 볼 때 '뭐야?'라고 하지만, 당연한 것은 애초부터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어떠한 행동패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한국인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강연의 내용과 관련한 개인적 느낌을 남깁니다


한국은 집단주의 사회라는 통념?


1970년대 이후 서양 중심으로 구축된 사회심리학적 통념상 서양은 <개인주의> 성향이고, 일본과 한국 등은 <집단주의> 성향의 사회로 본다. 한국은 <집단주의> 사회일까? IMF 금 모으기, 촛불시위 등 집단행동적 사건들로 본다면 일견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집단주의 사회는 '분노'수치가 낮다!


하지만, 여러 심리학적 연구결과에 따면 '분노'수치는 개인중심적 성향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할수록 분노 표출과 유지 성향이 강하고, 통제도 잘 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2019) 등 있다. 그렇다면, 한국 <집단주의> 사회라고 규정할 경우 분노수치는 상대적으로 낮아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가? '한국사회는 분노 수치가 높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90% 정도쯤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굳이 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화병"으로 대변될 정도로 한국사회 분노수치가 데 공감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은 <개인주의> 사회여서일까?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 하려는 '이기주의' 라거나, 명확한 자기 소신과 내적동기(신념 등)에 따라 행동하는 서양과 같은 '개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기에도 의문이 생긴다.


'한국'을 설명하는 다른 방법 ; <관계주의>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는 한국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와는 다른 <관계주의> 사회에 가깝다고 정의한다. <관계주의>는 집단의 목적보다 타인과 주고받는 관계에 목적을 둔 행동을  많이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인들은 주변인(아이들, 부모, 선후배 등)과의 관계를 생각하는(타인과 역량을 주고받는) 경향이 다. 따라서 자연히 그만큼 자기의 내적동기 비중은 낮아지게 된다.


아이들이 학교, 학과를 선택할 때 개인의 내적동기 보다는 부모나 선생님의 기대를 반영하고,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 선배의 식성을 배려해서 주문하거나 함께 간 동료들과 합의해서 주문을 한다. 돈을 지불하고 간 식당에서 주문편의를 위해 단일메뉴 통일해 달라는 주인장 권고 조차도 어색하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혹시 혼자 그 음식이 싫으니 다른 식당에서 따로 먹겠다거나 다른 메뉴를 시키는 사람을 고운 눈으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의나 눈치가 없는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으로 주홍글씨가 새겨질 것이다.


이렇게 직장생활 20~30년즘 한 후에 되돌아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관계를 중심으로 나를 맞춰가는 유연함을 단련하다 보니 눈치와 센스 있는 사람이라는 훈장까지 따라붙는다. 이렇듯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순발력과 눈치는 한국인의 사회생활에서 최고이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심전심..


역량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


반면 일본 같은 <집단주의> 사회는 '조직'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은 조직의 '부품'처럼 각자의 역할을 정교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이유가 없거나 불필요한 부품은 없다. 각자의 쓰임이 있을 뿐이다. 이런 유의 사회에서는 수많은 장인이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부품'이 된다는 것 노예가 된다는 것 아니다. 오히려 조직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완수할 때 하나의 큰 조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부품'이 바이러스에 걸린 PC처럼 시키지도 않은 일을 마음대로 하거나 융통성을 부린다면?

그것이 바로 사고이다!


하지만, 한국은 <집단주의> 성향의 일본과 달리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일을 매뉴얼에 따라 명확하게 정해둔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조정하고 맞춰가는 굉장히 유연한 방식을 선호한다.


매뉴얼대로  않고 현장 여건에 맞춰간다는 것은 적응력 높고 위기에 빠르게 대처하여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는 점 탁월하지만, 그만큼 완결성이나 디테일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 속성장기에는 다소 부족해도 이렇게 유연하게 맞추는 점이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최고를 추구해야 하는 지금의 한국은 보다 정교한 디테일이 필요한 상황이다.


인간관계로 구분되는 개인주의 vs 관계주의


서양의 <개인주의>에 따르면, 부모가 자식에게 도움을 줄 때도 본인의 노후 등 인생에 타격이 없는 범위에서만 자식을 지원한다.


하지만, 한국의 부모는 자식 인생을 바꿔주기 위해 (영향을 주기 위해) 서라면, 본인 노후 등 인생이 흔들 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당연 부모의 역할이고 희생이라고 생각하며, 자녀들도 이를 당연시한다.


MZ 한국인이라고 그러한 습성이 다르지 않다. 만약 MZ세대가 <개인주의>라면? 부모의 영향을 거부하고 바닥부터 본인 소신대로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게 부모가 집을 마련해줘야 한다거나 학비나 용돈 지원을 받는다.


선진국 문 앞에서 느껴지는 고민


허태균 교수는 이러한 <관계주의>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출산율 0.65 '저출'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고, 고속 성장기를 지난 이제는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의견제시한다.


한국 결혼적령기 MZ 성인이 된 이후까지 교육비,  주택자금을 지원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본인의 미래를 예측할 것이다. 그들도 <관계주의> 성향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히 결혼도 출산도 엄청난 부담과 무게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2세를 보고 양육하는 기쁨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실적으로 미래에 닥쳐올 관계의 무게가 너무 무섭기 때문  있다.


또한 조직발전을 위한 공정성, 효율성 등을 떠나 주변 사람들과의 주고받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 유착, 이권 주고받기 등 부정부패가 관행화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기 때문에,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관계주의> 욕구는 사적공간에서,

직업은 '부품'역할 완수로 전문성 르기


<관계주의>가 한국인의 고유한 특성이라면, 시대가 변했다고  한국인이 <개인주의>나 <집단주의>로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세대별 행동패턴 차이는 왜 느껴?


이 부분에 대해서는 1990년대까지는 가족 같은 회사였고, 가정보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당연했다. 그러니 회사에서 일하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2000년대 이후 근무시간이 줄어들면서부터는 사내동호회 등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관계욕구가 충족될 수 있었다.


하지만 IMF, 코로나 시기를 거치고 워라밸을 추구하는 시대적 흐름  맞물려 제 가족 같은 회사는 없다. 사가 부모나 가족처럼  노후를 보장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관계욕구는 이제 회사밖에서 각자 개인적 취미활동 등을 통해 충족해야 하는 황이다.


그러니, MZ에게 과거처럼 회사에서 니일내일 가리지 말고 열정을 보이며 관계욕구를 해소하라고 요구하는 건 뜬금없고 과도한 요구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회사에서는 불분명했던 부품의 역할을 명확히 알려달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다만 그 역할을 통해 전문성이 갖춰지고 본인이 성장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달라는 요구도 많다. 


우리 앞에 놓인 대한민국의 성장을 위해서는 한국인의 <관계주의> 특성을 인식하고,
이를 활용한 문제해결 대안을 마련하는 방향으로도 고민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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