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규칙 사이
공자는 기원전 5~6세기 춘추 시대에 활동했던 정치가,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 사후에 정리한 대화록인데, 아마도 한 번에 편찬된 것은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내용이 보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자의 말을 담고 있음에도 공자 스스로가 집필하지는 않았다는 점, 후대에 여러 번 다시 편집되었다는 점, 그리고 동아시아 정치사의 부정할 수 없는 배경이었다는 점에서 현대의 독자가 2,500년 전 공자의 원음을 분간해내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논어는 총 20편(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의 여러 발언을 각각의 편으로 묶었다는 점에서 편집자의 의도가 있기는 하겠지만 개별 편의 관통하는 주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유교의 대표 경전으로 함께 꼽히는 ≪맹자≫와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예컨대 ≪맹자≫의 첫 글인 양혜왕 상(上)편은 맹자가 양나라의 혜왕과 대화하며 왕도정치를 논하는 내용만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나 주제의식을 비교적 파악하기 용이하다. 하지만 ≪논어≫의 첫 글인 학이편은 잠언과 같은 여러 짧은 글이 분명한 연결관계 없이 배치되어 있어서 읽기에 조금 막연하다.
게다가 한문은 끊어 읽는 방법에 따라 뜻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고, 심지어 같은 한자도 시대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담곤 한다. 고문헌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통해 공자의 원음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고 이를 위한 수많은 연구가 쌓여 있지만, 그럼에도 ≪논어≫에 대해 쓴 거의 모든 글은 아마도 공자의 의도보다는 글쓴이의 의도나 상황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여러 주석본을 함께 읽으면 더욱 그러한데, 예컨대 주희의 ≪논어집주≫와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같은 문장을 완전히 반대되는 뜻으로 풀이하곤 한다. 자연히 2025년에 ≪논어≫를 읽는 사람은 스스로가 처해 있는 상황에 맞추어 잠언의 특정한 맥락과 해석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공자님 말씀"이란 표현은 대개 비웃음이다. 냉혹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만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논어≫는 문자 그대로 공자님 말씀을 받아쓴 책이니까 당연하게도 명실상부 "공자님 말씀"으로 가득하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법과 처벌이 아니라 덕과 예를 행하라는 위정편 3장이 대표적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법제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규제하면 백성이 형벌을 면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규제하면 백성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 선(善)에 이르게 된다."
거의 10년 전, 학부를 졸업하고 막 대학원생이 된 나는 이 글을 읽고 코웃음을 쳤다. 도대체 다수의 인간을 도덕으로써 이끌고 계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결국 다수의 인간은 제도와 규칙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5년에는 나의 상황과 경험이 바뀌며 이 문장을 마냥 비웃지 못하게 되었다.
나의 박사과정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처음 3년 동안은 수업을 들으며 연구 활동을 병행했다. 내가 속해 있던 연구실은 출퇴근 시간 규제가 딱히 없었고 코로나19 유행 이전에도 재택근무가 자유로웠다. 모든 연구를 컴퓨터로만 수행하는 계산화학 연구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교수님께서 근본적으로 학생들을 신뢰하셨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주말에도 카페에 가서 논문을 읽었고 휴가도 잘 다니지 않았다. 흔히 대학원생은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인간이라고(혹은 인간도 아니라고) 놀리곤 하지만, 당시의 나는 특별히 힘들다는 생각 없이 즐겁게 공부하고 연구했다. 지도교수님과의 관계도 좋았고 연구실 분위기도 편안했다. 무엇보다 나의 시간을 들여 공부하면 나의 실적과 보상으로 돌아온다는 감각, 시간의 주인이 나라는 감각을 갖고 일했다.
후반부에도 연구실 분위기는 똑같았지만 내가 전문연구요원으로서 대체복무를 시작했다는 점이 달라졌다. 내가 속해 있던 기관의 복무 관리 방침은 "매일 9시 이전에 출근하고 반드시 6시 이후에 퇴근할 것"이었다. 일찍 출근했더라도 일찍 퇴근할 수는 없고, 야근을 하더라도 다음 날 복무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다. 재택근무는 당연히 허용되지 않는다. 잠깐의 혼란기를 거쳐 나는 규칙을 완벽히 숙지하게 되었다. 9시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출근하거나 6시보다 조금이라도 늦게 퇴근하면 손해 보는 것 같은 감각이 들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컴퓨터를 켜지 않으려 했다. 주말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병역을 무사히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은 나는 기업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관리가 철저하기로 명성이 높은 기업이었고, 이곳에서는 월 단위로 근태를 관리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퇴근할 필요는 없었지만 매달 채워야 하는 근무 시간이 분 단위로 정해져 있었다. 화룡점정은 일종의 포괄임금제였는데, 매달 20시간까지는 초과근무 수당이 나오지 않았고 그 이후부터는 수당이 역시 분 단위로 지급되었다. 자연히 사람들은 두 분파로 나뉘었다. 필수 근무 시간만 칼같이 채우는 "워라밸족"과 법적으로 허용되는 최대 근로 시간을 정확히 맞추는 "생계형 초과근로자"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마음을 다해' 일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활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무 규제 없을 때는 자발적으로 매주 52시간 이상을 공부와 연구에 쏟았다. 매주 40시간 자리를 지키라는 요구가 내게는 그리 과도하지 않았다. 약간의 행정적 절차만 신경쓰면서 평소대로 생활해도 됐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반항기 청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규칙에서 허용하는 최소한의 일만을 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즐거움마저도 갉아먹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그때 나를 괴롭혔던 것은 조직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병무청은 복무자를, 회사는 직원을 신뢰하지 않아서 법과 제도로써 규제하려 하였다. 물론 조직이 신뢰를 잃은 데에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병역과 근태가 느슨히 관리되던 과거에 아주 태만하게 굴던 자들이 몇 적발됐을 것이고 이런 자들을 원천 방지하겠다는 구호 아래에 지리한 관리 규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열 명 중 하나 있을 게으름뱅이를 막기 위해 규칙을 도입하자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규칙을 해킹하는 방향으로 머리를 굴리게 되었다. 조직은 직원을, 직원은 조직을 신뢰하지 않는다. 결국 신뢰의 고갈은 조직 전체적으로 더 큰 비용을 치르게 한다. ≪맹자≫의 양혜왕 상편을 보자.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라고 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라고 하며, 선비와 서인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라고 말합니다. 위와 아래가 서로 이로움만을 취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 만일 의로움을 뒤로 하고 이로움을 먼저 하면 빼앗지 않으면 만족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덕으로써 원칙을 삼는다는 것은 사람을 신뢰해야 가능하다. 내 말을 듣고 있는 저 사람들이 나와 닮은 가치관을 토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고, 잘못된 행동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주변의 도덕적 비난에 상처받는다고 믿어야 한다. 물론 가족 수준의 소규모 집단이라면 모를까 기업이나 국가를 도덕원칙만으로 운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법과 규제가 느슨하던 과거에는 사회적 약자의 삶이 지금보다 더 비참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극단적으로 신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규칙에서 허용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해도 되고 규칙 외적인 양심의 가책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가성비가 나쁜" 길을 걷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비웃는다. 그 이면에는 모든 타인이 자신의 이익만을 노리는 비열한 존재라는 믿음, 미지의 타인을 불신하는 경계심이 있다.
한국은 OECD에서도 손꼽히는 저신뢰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신뢰할 사람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불신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반대급부로 무작정 신뢰할 수 있는 유사가족, 카르텔을 만들려 하는 것 같다. 타인을 대하는 기본 태도가 불신인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이들은 잘 모르는 타인의 의도는 항상 의심하며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형님이나 동생들과 과실을 나누고자 하는데, 재미있게도 그 유사가족을 특별히 신중하게 고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같은 학교 선후배, 코가 삐뚤어지게 함께 술 마신 사이, 아는 형님의 소개로 만난 사이 등 다분히 임의적이었다. 사실 누구든 좋으니 신뢰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
≪논어≫는 무작정 범인류애적 사랑을 설파하는 텍스트는 아니다. 공자는 신뢰를 깬 자를 제재해야 할 필요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헌문편 36장을 보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은덕으로써 원한을 갚으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은덕은 무엇으로 갚겠느냐? 곧음(直)으로써 원한을 갚고, 은덕으로써 은덕을 갚을지니라."
법과 규칙이 선행하면 모두가 이득과 가성비만을 따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악당에게 덕을 베풀어서는 안된다. 우선 타인의 의도를 신뢰하되, 위반자에게는 합당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 넘겨짚자면, 공자가 주장하는 인(仁)과 예(禮)는 신뢰 기반으로 사람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행동 양식인 것 같았다.
자공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써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마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지니라."
- 위령공편 23장
"대개 인(仁)한 자는 자기가 서고자 하는 곳에 남도 서게 해주고,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는 것에 남을 통달하게 한다. 능히 가까운 자신을 미루어 남의 처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면 인의 방법이라고 할 만하다."
- 옹야편 28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남과 더불어 잘 사귀도다. (사귐이) 오래되어도 그를 존경하는구나!"
- 공야장편 16장
물론 ≪논어≫의 이상 사회로 마냥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나이브한 생각이다. 주나라의 예법으로 돌아가자는 공자의 주장은 춘추 시대를 기준으로도 반동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법인과 개인이 마구 뒤섞이고 시장 논리가 모두를 채찍질하는 오늘날, 도덕률에 대한 몇 가지 금언만으로 사회를 고칠 수 있다는 건 좋게 말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해 무책임한 태도다. 그러나 타인이 나와 비슷한 도덕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믿되, 그 신뢰를 깬 자에게는 합당한 처벌을 가하고, 오랜 벗에게도 선을 지키며 예의바르게 대하는 태도는 정말 오늘날 설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을까?
- 이 글에서 인용한 원문은 김도련의 ≪주주금석 논어≫와 강동석의 ≪맹자≫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