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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May 04. 2024

금융상품을 이용해서 불법 선거자금을 없앤다???

인도가 만들어낸 신박한 ‘선거채권’의 짧고 굵었던 성공과 실패 이야기

선거판에서의 불법 자금은 어느 나라에서나 골치아픈 문제이다. 인도도 예외가 아니다. 선거법상 연방하원의원(Lok Sabha) 출마자의 선거비용 상한은 950만 루피(약 1억 4천만원)이고 주의회(Legislative Assembly)의 경우 4백만 루피(약 6천만원)이다. 인도의 1인당 국민소득이 2,500달러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선거비용 상한이 지켜진다고 믿는 인도인은 한명도 없다. 비공식적으로는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한 사람은 무려 4억 루피(약 60억원), 주 의회의 경우 6천만 루피(약 9억원)을 쓴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이렇다 보니 지난 2019년에 있었던 인도 총선에서 실제로 사용된 선거비용이 무려 85억 달러(약 11조원)에 달한다는 추산도 나오고 있다. 


인도보다 몇십배는 잘 사는 미국이 2020년 대선을 치루며 사용한 비용이 대략 144억 달러(약 19조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도야말로 가히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세계에서 가장 흥청망청한 고비용 선거를 치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법정 한도를 수십배씩 뛰어넘는 비용을 지출하기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탈법과 불법이 벌어져야 가능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판에서 불법자금을 없애는 효과적인 정책은 없을까? 불법 정치자금으로 인해 1947년 독립 이후 계속 골머리를 앓아오던 인도 정부가 마침내 2017년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마법같은 정책을 발명해냈다(라고 정부 여당은 주장했다). ‘선거채권(Electoral Bond)’이라는 제도가 도입된 2017년으로 가보자.




[# 1] 선거비용과 채권이 만난다는 신박한 조합...


우선, 선거채권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에 인도의 정치자금법이 어떠했는지부터 살펴보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정당은 기부자 1인당 20,000루피(약 30만원)가 넘는 기부를 받으면 기부자의 이름을 공개해야 했었다. 기업의 경우 순이익의 7.5% 또는 총 매출의 10%가 넘는 기부를 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결국, 정치 기부금을 합법적으로 제공하려고 하면 기부자의 이름, 그 기부자가 어느 정당에 기부했는지가 완벽하게 공개되는 투명한 시스템이었다. 물론, 사과상자나 공공칠 가방에 현금뭉치를 잔뜩 넣어서 전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실제로 많은 인도 기업들은 이런식으로 불법 자금을 정당에 갖다바치곤 했다.


그러던 2017년 2월. 인도 정부는 2017-2018회계년도(해당기간 : 2017년 4월 - 2018년 3월)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선거채권'이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정치 기부금 수수를 개혁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한다. 인도에서는 매년 2월초에 정부의 예산안을 발표할 때 중요한 재정 또는 금융 정책도 발표하곤 한다. 규모가 큰 투자 계획이나 주요한 국영기업의 민영화 계획도 함께     발표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선거채권은 사실상 정치관련 법령이었다. 실제로는 정치 기부금을 주고받는 방법을 엄청나게 바꾸게 될 중대한 입법 사항을 마치 금융 정책 중 하나인 것처럼 포장해서 스리슬쩍 발표한 것이다. 채권(Bond)라는 말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속이는데 아주 유용했다. 이렇게 도입된 선거 채권 제도는 약 7년간 시행되다가 2024년 봄 인도 대법원으로부터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중단되게 된다. 대법원의 판결문과 그 동안 선거채권 제도를 파헤친 몇몇 용기있는 언론들이 밝힌 내용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하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문제였는지 알아보려면 일단 선거채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선거채권은 요렇게 생겼다 (출처 : The Hindu)

일단, 유권자 또는 기업이 정당에 정치기부금을 기부하고 싶다면 그 사람은 인도 국영은행인 State Bank of India 지점에 가서 '선거채권을 사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된다. 물론, 기업의 경우 적법하게 설립된 회사인지 등을 따지는 사전검토 절차가 좀 있기는 하다. 약간의 행정절차를 마치면 그림처럼 생긴 '선거채권'의 실물을 수령하게 된다. 여기서 약간의 추가 설명이 필요한데, 우선 이 채권은 무기명 채권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채권의 어디에도 누가 이 채권을 샀는지 적혀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이 채권의 실물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언제든지 은행에서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1,000루피(약 1만 6천원), 1만 루피, 10만 루피, 100만 루피, 천만 루피(약 1억 6천만원)까지 다양한 권종으로 판매된다. 현금으로는 구입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금출처 조사가 가능한 수표 또는 자금 이체로만 판매된다. 이 채권을 구입한 유권자 또는 기업은 이 채권의 실물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전달하면 된다. 채권을 기부받은 정당은 가까운 SBI 지점에서 이 채권을 현금으로 바꾸면 된다. 채권을 현금으로 바꾸는 권한은 인도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정당만 할 수 있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정당이 아닌 다른 조직(예 : 제3의 기업)이 이 채권을 제아무리 현금화하려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이 선거채권 제도는 어떤 장점이 있을까? 집권여당인 BJP는 어떤 점을 집중적으로 홍보했을까? 첫째, 개인이나 회사가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에도 자유롭게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누가 채권을 사는지 채권에 적혀 있지 않으므로 집권여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채권을 구입해서 야당에 기부하면 된다고 집권여당은 주장했다. 또한, 현금으로는 구매할 수 없기 때문에 불법 정치자금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집권여당 BJP가 언급하지 않은, 그러나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한 이슈들이 있다.


첫째, 유권자 또는 기업 하나당 얼마나 많은 채권을 살 수 있는지 상한선이 없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개인의 경우 2만 루피가 넘는 정치자금 기부를 하면 이름을 다 공개해야만 했고, 기업의 경우 매출액 또는 당기순이익에 따라 정치자금 기부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선거채권이라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러한 상한선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한 마디로 무한대로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야당과 시민사회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로, 이 채권은 오로지 국영은행인 SBI의 지점에서만 판매된다는 점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게 무슨 큰 문제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SBI의 은행장은 인도 정부가 임명한다는게 문제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인도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SBI의 팔을 비틀어서 어떤 유권자 또는 어떤 기업이 얼마나 많은 채권을 샀으며 각 정당들은 얼마나 많은 채권을 현금화했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는 거다. 반면, 일반 시민이나 야당은 이러한 중요한 정보를 알고 싶어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이러한 정보접근의 불균형에 대해서도 우려를 제기하였다. 셋째로, 각 정당별로 얼마까지만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라던지, 또는 각 정당별 입후보자가 몇명이니 얼마만 받을 수 있다라던지 등의 정당의 입장에서의 상한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당별로 실제 선거에서 사용 가능한 금액의 몇배가 넘는 금액도 자유롭게 기부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 2] 막상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2017년에 이 제도가 도입된 이후 각 정당별들은 선거채권 제도를 통해 얼마나 많은 정치기부금을 기부받았을까? 인도 유력 경제지인 Business Standard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19년 4월부터 2024년 1월까지 선거채권을 통해 제공된 정치자금은 무려 1,277억 루피(약 1조 9,200억원)이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1위를 차지한 집권당 BJP가 2위부터 7위까지의 6개 정당을 합한 금액보다 더 많은 606억 루피(약 9천억원, 전체의 47.5%)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동안 2등인 AITC는 161억 루피(12.6%)를 3등인 인도의회당은 142억 루피(11.1%)를 받았다. 한 마디로 집권여당인 BJP가 선거채권 제도로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이었다. 야당과 시민사회가 우려하던 집권 여당으로의 정치자금 집중화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나 많은 정치자금이 집권당으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야당이 정보공개를 끈질기게 요청한 후에 대법원의 공개 명령에 따라 SBI가 정보를 공개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이 소수의 거대 정당에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반 국민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2024년 3월 인도 대법원이 선거채권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리면서 시민의 ‘정보접근’이 제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에 수긍가는 대목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이어야 할 유권자가 이렇게도 중요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인도 대법원은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도, 집권여당 BJP의 2인자인 내무장관 아미트 샤(Amit Shah)는 대법원 판결 직후 인도 유명 언론사가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출연하여 ‘선거 채권은 총 2,000억 루피가 팔렸는데, 그중 집권당에게 기부한 돈은 600억 루피에 불과하고 야당에게 1,400억 루피가 돌아갔다’라는 거짓말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거침없이 했다. ANI나 India Today 등 인도의 주류 언론들은 정확한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아미트 샤 장관이 불러준 숫자를 그대로 받아적어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야당을 공격하는 여당의 편을 들어주었다.


두 번째로, 인도 대법원은 ‘정당이 기부자의 익명성을 quid pro quo에 악용해서는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선거채권은 무기명 채권이기 때문에 선거채권을 어느 누가 구매하여 어느 정당에 주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집권당이 마음만 먹으면 기부자를 겁박하여 기부를 강제로 받아내거나 반대로 기업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유도하기 위해 정당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인도 대법원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인도 대법원의 걱정은 기우였을까 아니면 근거가 있는 우려였을까? 인도 언론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최대 금액을 기부한 30개 기업중 절반에 가까운 14개가 세무조사를 포함한 각종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상당수의 기업이 선거채권을 구입하여 집권여당에 전달하자마자 세무조사가 중단된 것으로 나타났다. 선거채권 제도가 이런 특혜를 은밀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수단이란 것을 알아차린 적지 않는 인도 기업들이 완벽한 정경유착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선거채권 덕분에 합법적으로 뇌물을 줄 수 있게 된 환경을 풍자한 만화(출처 : The Quint)

인도 대법원은 또한, 상한선이 없는 정치기부금이 허용되면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free and fair election)가 불가능해진다는 점도 지적했다. 대기업이 거대 정당과 짬짜미를 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소수 정당과 일반국민들이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선거채권 제도가 기득권층이 인도 정치를 독점할 플랫폼을 제공함으로써 인도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대법원에 선거채권 제도의 위헌심판을 청구했던 시민단체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2018년 3월부터 2024년 7월까지 판매된 선거 채권중 가장 소액권인 1,000루피권은 100매도 판매되지 않은 반면, 가장 고액권인 1천만 루피권(약 1억 6천만원)은 무려 1만 2,999매나 팔렸다. 한 마디로 자금능력이 좋은 대기업들이 과거에는 으슥한 곳에서 현금으로 주던 뇌물을 이제는 좀더 환한 곳에서 맘 편하게 ‘채권’이라는 세련된 방법으로 무제한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 3] Quo vadis, India’s Democracy?


사람들은 흔히 선거로 공직자를 뽑을 수만 있다면 그런 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선거는 치러진다. 심지어 북한은 자기들의 나라 이름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떠억 하니 붙여놓았다.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붙여봤자, 아무리 호들갑을 떨고 선거유세를 하고 몇 억명이 선거에 참여한다며 자랑을 해도 그 선거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진다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인도의 민주주의는 매우 안타깝지만 지금 위협받고 있다.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기업의 금권에 휘둘리면서 운동장은 형편없이 기울어졌다. 인도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거대 자본뿐일까? 그렇지 않다. 


2024년 3월초, 스웨덴에 위치한 민간 연구기관인 V-Dem은 ‘2024년 민주주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4년부터 전 세계 국가들의 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해온 이 기관은 인도를 ‘가장 빠르게 독재화되고 있는 나라’라고 평가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모디 정부 하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위협하고 학자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라고 진단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24년 선거에서 모디의 당선이 확실시된다. 모디 정권하에서 민주주의가 상당 부분 후퇴한 점 그리고, 소수자들의 권익과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어 왔던 점을 감안하면 모디의 당선은 인도의 독재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다’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인도의 민주주의 지수가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다(출처 : V-Dem)


자, 이제 인도 정부는 이 보고서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거대 기업의 횡포와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 그리고 학문의 자유를 위협해왔던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객관적으로 반성하고 야당과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을 멈추겠다고 (빈 말이라도 좋으니) 발표했을까? 그렇지 않다. 아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서구의 편견’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바로 자신들이 고유의 ‘민주주의 지수’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_^;) 인도내 몇몇 언론에는 이렇게 애국적인 일을 담당할 연구기관이 어디일지에 대한 추측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인도에서 들려온 흥미로운 소식을 접한 아랍계 신문 알자지라(Al Jazeera)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ㅋㅋㅋ). 인도 고유의 민주주의 인덱스 개발과 관련한 진척 상황을 묻는 짓궂은 질의서를 인도 외무부, 인도 법무부 등에 보냈다. 알자지라는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인도경제자문위원회(Economic Advisory Council of the Prime Minister) 소속 경제학자인 산지브 사냘(Sanjeev Sanyal)의 사무실에서만 답변이 왔다고 밝혔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답변은 짧고 명료했다고 한다. 


그 답변은 “경제자문위원회 소속 산지브 사냘은 겁나 바빠서 답변을 못해드립니다.(Shri Sanjeev Sanyal ji, Member EAC-PM has a hectic official schedule, hence request for comment is regretted.)”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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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일부 편집을 거쳐 딴지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808012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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