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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 Feb 26. 2024

사는데 정답이 어딨겠어

 영유아 건강검진은 생후 14일부터 6세 미만 아이를 대상으로 성장 또는 발달 이상, 비만 등을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관리하는 검진이다. 대근육 운동, 소근육 운동, 인지, 언어와 같은 항목에 5 ~ 6개의 질문이 있는데, 부모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잘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 못하는 편이다, 전혀 할 수 없다' 4가지 중 선택해야 한다.


 현승이도 얼마 전 42 ~ 48개월 영유아 검진을 받았다. 검진을 받기 위해서는(병원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먼저 병원에 예약을 하고, 방문 전에 건강보험공단 앱인 'The건강보험'에서 미리 건강검진 문진표와 발달 선별 검사 문진표를 작성해야 한다.


 "현승아, 의자가 뭐야?"

 "악어!"

 "왜?"

 "이러케 하면 악어야"


 발달 선별 검사 문진표를 작성하는 중에 나온 아이의 대답이다. 의자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이가 놀이할 때 쓰는 초록색 의자를 뒤로 엎어 놓고는 악어라고 말했다. 문진표의 질문은 '단어의 뜻을 물어보면 설명한다'였다. 예를 들어 '신발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나갈 때 신는 것'이라는 대답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숟가락은 뭐야?" "무당벌레!" 숟가락을 식탁에 뒤집어 놓고는 '짠'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확실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대답이 귀여워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아이에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의 대답은 틀린 걸까? 나는 '잘한다'에 체크를 해야 할까, '하지 못한다'에 체크를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요즘 자기 개발서는 잘 읽지 않는다. 예전에는 밑줄까지 쳐가며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다짐하며 열심히 읽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주 보던 육아서도 한 발자국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해' '아니지, 그럴 땐 이게 맞지' 맞다, 아니다를 따지고,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해야 한다는 단호함들이 피곤했다. 글자들이 마음속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고, 눈앞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살아온 환경과 상황, 성격, 함께 지낸 온 사람들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답이 나올 수 있을까? 아이들만 봐도 그렇다. 3월이 되면 아이들은 새로운 어린이집, 유치원 또는 학교에 가야 한다. 신학기가 시작하면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처음 만나는 선생님과 친구들, 낯선 공간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들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현승이는 호기심이 많고 낯을 가리지 않아 처음보다는 5 ~ 6개월 다녔을 때 신경 쓸게 많았다. 어린이집 전원(어린이집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후 단 2일 만에 낮잠을 자기 시작했으니 적응력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아이는 새 친구와 장난감에 대한 자극이 줄고, 공간이 친숙해졌을 때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이 아이에게 맞지 않는 걸까.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해요'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엄마는 많지만, 답변은 다양했다. '아이가 엄마랑 있는 게 더 좋아서 그럴 거예요' '낯설어서 그래요' '아이 성향에 유치원이 맞지 않을 수 있어요, 전원 해보는 건 어떨까요?' 아이가 동일한 행동을 보인다고 해도 해결책은 많았다. 현승이의 담임 선생님은 아무래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친구들을 매일 보니까 흥미가 떨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성향을 보면 맞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문진표에 '할 수 있는 편이다'로 체크했다. 문진표가 의도하는 대답이 아니라 차마 '잘할 수 있다'를 고르지 못했지만, '의자는 악어'라는 아이의 기발한 대답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문진표를 의사가 아닌 엄마가 작성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엄마의 생각이 반영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아이를 객관식으로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살아가는데 정답이 어딨겠는가. 앞으로 살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 아이에게 열린 결말을 남겨주고 싶었다.


문진표 중 '사람(엄마, 아빠)을 그리라고 하면 신체의 세 부분 이상을 그린다'의 답(왼쪽 : 아빠, 오른쪽 : 엄마와 뱃속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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