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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기 Feb 28. 2022

중립이라는 악마

중립과 정의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부당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면, 박해자의 편을 택한 것이다. 코끼리가 생쥐의 꼬리 위에 자기 발을 올리고 있는데 '중립을 지킨다'라고 하면, 그 생쥐는 절대 중립에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 데스몬드 투투










  아마 중립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생각해본  없을거에요.  또한 중립은 어느 입장에도 휘둘이지 않는 현명한 입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장 내에서 혹은 사회 내에서 부당한 일을 크게 겪다 보면, 부당한 일의 근원인 가해자보다 오히려 옆에서 중립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중립의 의미를 살펴보면,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인 입장에 섬. 또는 그런 입장.이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현명한 태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태도는 피해자에게 굉장히 큰 상처를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은 악마와 같이 비칠 수 있을 정도로 피해자에겐 악랄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 경험 중 한 가지를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전 MBTI가 ENTP입니다. MBTI에 과몰입 상태는 아니구요. ENTP가 직장생활에서 굉장히 어려운 성격인 것 같아요. 저는 업무상 흐지부지 지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안건이 생기면 그 즉시는 아니더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불합리하거나 부당한 것들에 대해서는 그냥 참고 넘어가질 못해요. 그리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인 사람에게 그것은 비상식적이라고 꼭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말싸움, 언쟁을 해서 저에게 이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한 번은 포스에서 포스팅하는 문제로 주방과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였냐면 음… 이게 카페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분들이 아니면 이해가 잘 될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해볼게요.


  포스에는 '주방 메모'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음식 조금 천천히 조리해주세요.' '오이 빼주세요.' '조개 알러지 있어요.' 등 주방에 특별한 요청을 주방에 전달하기 위한 기능이에요. 말로 전달하면 잊어버릴 가능성이 크고, 매번 주방 안에 적어주러 가기도 굉장히 시간 소모가 많기 때문에 이 기능으로 의사전달을 합니다.


  이 기능이 있는 걸로 아는데 프로그램에 보이지 않아서 개발팀에 얘기해서 기능을 살려놨습니다. 사실 제가 이 기능을 꼭 가져오려던 이유가 요청을 구두로 전달하니 대답은 해놓고 못 들었다는 경우가 허다해서 기어코 살려놓은 기능입니다. 하지만 기능이 익숙치 않으니 한 달 동안은 '주방 메모'를 적게 되면 '주방 메모 있으니 확인 바랍니다.'라는 말을 구두로 하고 한달이 지난 그 이후부터는 따로 구두로 전달하지 않겠다고 합의했습니다.









  한달 두달이 지나고, 홀 파트타임 직원이 ‘주방 메모’를 잘 써서 넣어준 주문서에서 메모 내용을 확인하지 않아 음식을 원래 그대로 내어주자 파트타임 직원이 ‘특별요청 있는데 음식이 그대로 나왔다’며 주방에 음식을 다시 조리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셰프는 ‘시간도 여유로운데 왜 말로 전달하지 않았냐’며 오히려 그 파트타임 직원에게 역정을 냈죠. 처음에 합의한 내용은 아마 귓등으로도 안들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너무도 당당하게 파트타임 직원을 타박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실 한번은 어느정도 잡음이 있을거란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업무적 예의가 없는 행동에 더 화가났습니다.


  당시 제가 점장이었지만 다음 날 퇴사 예정이었기에 다른 것보다 이 문제는 해결해야 남아있는 제 직원들이 다음에 이런 문제로 피해를 보지 않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합의가 있어도 내가 기분이 나쁘면 내 성질대로 합의를 언제든 깰 수 있다는 걸 용인하는 것 밖에 되지 않겠죠.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지 않게 한 번은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손님 주문이 잠깐 멈춘 시간에 주방으로 들어가 셰프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간단한 질의라 따로 자리를 만들지 않고 바로 물었습니다. '주방 메모' 문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첫 번째 대답은 ‘나가라’였습니다. 우리가 주방 메모에 대해 일정기간 이후에는 따로 구두로 말씀드리지 않겠다 합의했는데 왜 매뉴얼대로 잘 주문 넣은 직원을 타박하셨죠? 두 번째 대답도 ‘나가라’였습니다. "이 합의에 대해 다시 얘기해봐야죠."라는 말에 셰프는 젓가락 든 손으로 저를 때리면서 "나가라고 개새끼야!"라며 홀에 손님들에게 소리가 다 들리게 난리를 피우고 심지어는 저에게 칼로 위협을 했습니다. 칼로 위협할 때 그 서늘함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느낌입니다. 정말 코 앞까지 칼날이 날아오는 것 같은 두려움이 순간 겁을 집어먹게 합니다.


  저는 본사에 이야기한 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한바탕 소동이었죠. 쇼핑몰이었는데 경찰차 사이렌 소리로 매장은 시선집중 되었습니다. 몰랐는데, 칼로 위협한 건 단순 폭행이 아니라 살인미수가 적용돼서 바로 검찰로 넘어가더라구요. 사실 전 합의금 정도로 생각한 건데 제 생각보다 일이 커졌어요. 다친 곳은 없어서 합의금은 없겠지만 뭔가 작은 처벌이라도 있어야 다음에 이런 문제를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검찰로 넘어가는 일이니 합의도 안되고, 심지어 CCTV에 폭행과 칼로 위협하는 게 너무도 적나라하게 나와서 빼박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처벌로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동의서까지 자필로 써서 경찰에 사진 찍어 보내고 별짓 다해서 막어줬지만 나중에 그 사람 입에서 "걔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냥 검찰로 넘겨버릴 걸 그랬어요.







  제가 이 사건으로 들었던 말들이 있어요. 전 당시 그 망나니같은 행동보다 그 후에 들었던 말들에 충격을 여러분 받았습니다. 다음날 주방에 같이 있던 이모에게는 "그래도 어른인데…" 같이 일하던 주방 형도 어른 드립 치면서 선을 넘는 말을 합니다. 본사 차장이란 사람은 저도 같이 말썽을 일으킨 공범 취급까지 당했죠.


  나중에 어쩌다 다른 사람에게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 했을 때 "근데 그건 그 사람 입장도 좀 봐야 할 것 같은데"라는 말도 들어봤습니다. 손으로 턱을 잡으며 고심하는 표정을 하면서 말이죠. 단순히 갈등 상황에서 언쟁을 통해 해결해가는 과정이었으면 상대의 의견을 듣기전까지는 그 사람의 입장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는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직원간의 폭언, 폭행 그리고 살인미수의 행위가 오간 현장에서 그 사람 입장도 들어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은 칼을 휘둘러도 합당한지, 폭행과 폭언을 해도 되는 상황이었는지를 따져보자는 말입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폭행과 폭언, 칼로 사람을 위협하는 행위는 어떠한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은 되도 안되는 중립인 척 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위험한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다른 친구에게도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제가 서비스 시간인데 일을 방해했다느니, 그래도 셰프인데 다른 직원 앞에서 이야기 꺼내는 건 아니라느니 하면서 저의 잘못인 양 몰리고 있어서 나중에는 제가 변명하는 꼴이 되었어요. 점장이었는데 그 정도 분위기 파악 안 하고 이야기 꺼냈을 리 없고, 다른 직원 앞에서도 이야기 한 이유는 본인이 너무 당당하게 자신이 맞다며 그 파트타임 직원에게 역정을 냈으니 따로 부를 이유가 없었죠. 오히려 따로 불러내면 제가 혼내는 꼴이 되니까요.


  방식과 그 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됐을 것을 본인이 열 받는다는 이유로 행패를 부려 그 사달이 난 건데 저도 같은 문제아 취급이 되는 게 기분이 별로더라고요. 마치 학교에서 일방적 폭행을 당했는데 같이 싸웠다며 선생님한테 같이 혼나는 기분 같았어요.









  저는 중립이라는 뜻이 누가 더 옳았느냐를 따지는 중심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검색해보니 중립이란 뜻은 제시된 표본 안에서 상대적인 기준으로 중간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 이해가 어렵죠..?


  예를 들면 어떤 학생이 청소시간이라 청소를 했을 뿐인데 한쪽 구석에서 자고 있던 다른 학생이 청소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며 그 학생을 폭행했습니다. 하지만 맞은 학생은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별다른 조치 없이 그저 그 학생을 말리기만 하다 선생님에게 걸렸습니다. 하지만 한쪽 구석에서 소란이 생겼으니 교무실에 같이 불려 갑니다. 여기서 정상적이라면 폭행을 한 학생에게만 질책을 하며 반성을 요구하는 게 맞죠. 하지만 중립은 여기서 두 사람에게 똑같은 질책을 하는 겁니다. 왜냐면 그 중립에 선 선생님 눈에는 똑같이 소란을 피웠으니까 둘 다 잘못한 거죠.


  청소하다가 그저 맞은 학생을 '0'의 기준에서 '1'이라고 봅시다. 잘못한 건 없지만 잘한 것도 없으니 '1'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폭행한 학생은 '-9'라고 볼게요. 저는 중립이라는 게 '0'의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중립은 '-4'의 기준에서 판단하는 거예요. 그저 맞은 학생에게 "너도 잘한 거 없어"라면서 혼내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대체 뭘 잘해야 하나요? 거기서 뭔가를 잘하지 않으면 안 됐던 건가요? 잘못만 안하면 됐지 거기서 그 폭행을 한 사람을 교화시켜서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어야 했나요? 생각해보니 '너도 잘한 거 없어'라는 말이 중립에 선 사람들이 남을 비난하기에 정말 유용한 말이네요. 말리는 시누이가 미운 이유를 이제 알것 같습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사람보다 이런 태도의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외로움과 절망감을 더 자극하는 데 한몫하죠.


  대표적인 예시가 성범죄를 당한 사람에게 ‘그러게 누가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래’ 혹은 ‘그러게 누가 그 시간에 돌아다니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시간에 그 골목은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니 늦은 시간에는 조심하자’ ‘좀 더 치안이 좋은 곳에서 지내는 게 좋겠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옷을 그렇게 입은 사람 혹은 그 시간에 돌아다닌 사람에게 중립의 입장에서 이 사건의 책임을 가해자와 동등하게 부여하려는 말입니다.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하려던 게 아니라…’ 너의 의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너의 의도가 어찌됐던 너의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의도가 그렇지 않으면 말을 똑바로 하세요. 성인이 돼서 말 한마디 잘못한 게 문제인겁니다. 말을 잘못했으면 내 숨은 의도를 파악해주길 바라지 말고, 사과하고 말을 정정하세요.


  제가 감히 뭔가를 조언하자면, 모든 일에서 중립에 서지 마세요. 옳고 그름을 확실히 판단하는 사람이 되세요. 중립은 내가 어떤 여론이든 나는 중간에서 휘둘리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뭐든 백지부터 뜯어보며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내 가치관 없이 휘둘리는 사람이 돼요. 질문을 하세요. 의문을 가지고 의심하세요. 막연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덕목들에 대해서도 한 번씩 의심해보세요. 그게 정말 맞는지.


  중립이라는 건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저 방관자로서 내가 피해를 덜 받기 위해 어디 위치할까 각 재는 것 밖에 안돼요. 옳은 것에 뚝심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물론 저도 그런 사람이 되려면 멀었죠 당연히. 누군가에게 가르치려는 보다 저 또한 그럼 사람이 되고자 그리고 그런 길을 같이 걷자는 뜻입니다.






이 글은 응암동에서 가장 와인을 잘 아는 집

루기스의 글입니다.


와인을 사이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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