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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이타임 Aug 10. 2023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세상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

 지난 2월 15일,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을 포함한 장애인 인권단체에서 지하철 시위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해 달며 간절히 외쳤다. 정부는 시위를 강압적으로 제압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면 나왔을까요.”

“억울한 건 알겠지만 바쁜 출퇴근 시간에 시위를 해서 불편한 건 사실이죠.”          


 네티즌들은 장애인들의 시위현장을 담은 뉴스를 보며 갑론을박을 벌였다. 어떤 현상을 바라보며 사람마다 다양한 의견을 갖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정당한 시위를 폭력적이고 불법행위라고 몰아세우는 기사와 댓글을 볼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대학시절 특수교육학개론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교수님은 이론적인 내용보다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느껴볼 수 있도록 체험해 보자고 제안하셨다.          


 첫날은 시각장애인 체험이었다. 눈을 감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나는 분명 정면을 항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눈을 떠보니 몸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감이 밀려왔다. 시각장애인용 지팡이에 의지해 나아갔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캄캄한 세상 속에선 도무지 움직일 자신이 없었다.          


 한 번은 휠체어를 타고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는 수업이었다. 목적지는 매점이었다. 강의실에서 매점이 있는 학생회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작은 동산을 넘어야 했다. 당연히 휠체어로는 갈 수 없어 길을 돌아갔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아무 생각 없이 올랐던 계단,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던 내리막길은 긴장감을 주었다. 5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20분을 넘겨 도착했다. 갈증이 나고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가장 찝찝했던 건 모든 사람이 하루 24시간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솔직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업만 끝나면 두 눈, 두 다리 멀쩡한 채로 다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수교육 수업을 계기로 바뀐 것이 있었다. 하나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새삼스러운 안도감이었다. 다른 하나는 장애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저상버스가 오길 기다리려면 평소보다 3~4배의 기다림이 필요하겠구나. 급하게 화장실을 가려면 장애인 화장실이 갖춰진 곳을 찾아야 하고 그 마저도 깨끗하지 않으면 곤욕이겠구나. 백화점에선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없으니 반드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겠구나.          


 수업의 마지막 날, 교수님은 비장애인도 장애인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버스도 전부 저상버스, 화장실도 장애인 화장실과 똑같은 형태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하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으며 무엇보다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해요. 사람은 언젠간 장애를 갖게 될 수 있거든요. 나이를 먹든지, 불의의 사고를 당하든지...”           


 사실, 내 주변에도 장애가 존재했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함께 살았던 집엔 은색 손잡이가 집안 곳곳에 붙어 있었다. 혼자서는 걷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위해서였다. 화장실에 갈 때면 손잡이에 의지해 힘겨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한 후배의 어머니는 시각장애인이다. 후배는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가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며 AI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진보하는 기술과 함께 언젠가는 장애라는 표현이 무색한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가장 중요한 건 기술보다 장애인의 불편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필요한 장치를 개발하고 예산이 부족하더라도 보편적 시설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체험해 본 이후 ‘나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 장애를 피할 수 있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장애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장애인의 불편함을 헤아리는 마음이 모여 장애를 가져도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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