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2021년 가을, 새로운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으레 이 병동의 순서가 그렇듯 긴 설문지를 작성하고 예진실로 향했다. 심드렁한 표정의 선생님이 모니터 앞에 앉아 내 설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름 성실하게 대답했으나 뭔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은 없었다. 그는 힐끗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우리의 대화는 말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나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자주 드시나요?”
“아니요.” (세상에 지금도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은요?”
“아니요.”
“자주 슬프거나 우울해지나요?”
“그건 가끔요.”
“충동적인 행동이 잦아졌나요?”
“전혀요.” (충동은 나의 로망일 뿐.)
“죽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절대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힘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기계적으로 타이핑을 이어가던 선생님이 나를 바라봤다.
꼭 ‘뭐지?’ 이런 표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내 상태를 어필하기 위해 좀 더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했다.
“선생님. 저는 죽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죽을까 봐 왔어요. 죽을까 봐 죽을 것 같아요.”
진심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알겠다는 듯이 끄덕이고 타이핑을 이어가더니 밖에 나가서 앉아 있으면 호명하겠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그 병동의 어느 교수님을 만났고 장황하게 증상을 설명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뇌파검사를 추가로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약간의 약 처방을 받았다. 들어는 봤나. 알프람!
꼭, 10년 만에 다시 먹기 시작하는 신경안정제였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우는 약인 셈이었다. 효과가 좀 있나 싶었다. 며칠 가지 못했지만. 그 시간들을 너무 괴롭게 보내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심리상담을 권했다. 병행하면 좀 더 효과가 좋을 거라고 했다. 단발머리에 인자한 (스카프가 잘 어울리는) 상담 선생님이 첫 상담을 끝내고 나에게 숙제를 냈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죽음을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생각하세요. 되도록 끊임없이, 가능한 끝까지.'
정말 좋은 사람인 줄 알았지 뭐람. 아, 어떡하라는 거죠? 못하겠는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퍽 성실한 환자이며 내담자였다.
그러니까 이 글은, 죽음을 지워내기 위해 약을 먹어가면서 초 단위로 죽음을 생각하는 글이다.
되도록 끊임없이, 가능한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