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관리를 못하는 모든 월급쟁이들에게
나는 표정관리를 참 못하는 사람이다. 혹자는 나더러 “수박 우유 씨는 참 투명하고 앞 뒤가 똑같아서 좋아요”라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회사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너 진짜 사회생활 못한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2008년에 홍보대행사 인턴으로 시작한 직장 생활은 외국계 회사를 거쳐 현재 직장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회사 생활 중 가장 어려운 것을 꼽으라면 그건 야근도, 성질 더러운 상사도 아닌 바로 ‘표정 관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집 안에서 막내로 자란 탓인지 모르겠으나 나란 사람, 정말 표정 관리를 못한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이런 성격, 나의 절친들은 “너 정말 쿨하고 화끈하다!!”라고 치켜세워 주지만 회사생활을 하는 데는 정말 마이너스다.
대학 졸업 후, 약 4년간 언론사 지망생과 행정고시 준비생 신분을 전전하던 중, 행정고시 1차를 떨어지고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이력서를 넣어 들어간 곳이 외국계 홍보회사였다. 홍보회사는 ‘갑을병정’ 중에 ‘정’의 위치에 있다고 할 정도로 대외적으로는 기자, 클라이언트에게 치이고, 내부적으로는 직장상사에게 치이는, 그야말로 전쟁터와도 같은 곳이다. 기자들의 ‘진상질’을 참아내고, 클라이언트의 ‘갑질’을 이겨내야 비로소 고연봉을 받고 이직을 하거나 자기 회사를 차릴 수 있다. 하지만 투명하고 솔직한 성격의 나는, 원치 않는 기자 점심에 클라이언트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며 일하는 홍보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고역이고 지옥 같았다.
그런 점에서 A대리는 나와는 참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 분위기를 휘어잡는 말 센스, 덤으로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한 그는 회사에서 그야말로 ‘핵인싸’였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뚱한 표정으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 A대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박 우유 씨는 대학교 때 연극 좀 배웠으면 좋았을걸”
“연극반이요? 무슨 뜻이에요?”
“저는 대학 때 4년 동안 연극반 활동을 했어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했던 건데 이게 사회생활하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내가 순진하게 있는 집에서 엄마에게 하듯 온갖 성질 다 부리고 있을 동안, A대리는 대학 때 연마한 연기력으로 회사에서 철저히 연기를 하고 있었다. 앞에선 웃으며 네네 하다가 뒤돌아서면 카이저 소제처럼 반전 표정으로 싹 바뀔지언정 어차피 좋은 게 좋은 거, 기분 좋게 연기를 해주는 내공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A대리에 대한 홍보 대행사 대표의 사랑은 지극했다. 중요한 미팅과 술자리에는 늘 A대리와 함께했고 나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뒷전이었다. 속으로는 A대리를 부러워하고 시기했지만 다들 “A대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A대리는 이 회사에서 상무까지 올라갈 거야”라며 그의 직장생활 만렙에 가까운 표정 관리 능력을 부러워했다.
그 당시 나는 인간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풋내기 신입의 관점으로 ‘이런 가식적이고 진정성 없는 놈.. 윗사람들이 A대리의 가식을 어서 눈치채야 할 텐데’ 라며 비난했었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지금, 곱씹어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틀렸고, A대리가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 A대리의 말을 듣고 직장인 연극 동호회라도 가입하여 표정 관리 기술을 연마했더라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사로부터 사랑받는 직장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일관되고 순수한 모습은 친구 관계에서나 고려될 요소이지, 직장에서는 좀 더 정제되고 기름 장어 같은 이미지를 구현할 필요가 있다. 회사라는 곳은 조직원 개개인이 제한된 장소에 옹기종기 모여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철저하게 자신을 방어하고 또 상대방을 공격하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라면 영화 ‘변검’(The King of Masks, 1995)에 나오는 연극인처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야말로 여러 가지 얼굴과 표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표정이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감정이 태도가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자연인 ‘수박 우유’는 옷장 속에 고이 걸어놓고 전쟁터와 같은 직장 생활에 살아 남기 위해 갑옷을 챙기듯 사무실용 ‘부캐' 가면을 쓰고 오늘도 회사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본다.